서울문학기행, 심훈의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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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심훈의 「그날이 오면」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2.07.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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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의 염원을 시로 형상화한 항일 저항시
‘2022년 서울문학기행’의 두 번째 문학기행은 심훈의 조국 독립을 갈망하는 저항시「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진행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2022년 서울문학기행’의 두 번째 문학기행은 심훈의 조국 독립을 갈망하는 저항시「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진행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김효설 기자] 서울 속 문학 이야기를 펼쳐가는 ‘2022년 서울문학기행’의 두 번째 문학기행은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진행됐다. 조국 독립을 갈망하는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통해 조국을 위해 살다 간 그의 문학적 업적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이와 함께 심훈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태어난 현 동작구 흑석동의 심훈 공원, 심훈 생가터와 함께 주변의 사육신 역사공원과 용양봉저정, 효사정 등을 탐방했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의 해설은  1995년 단편소설 「떠오르는 섬」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고은주 작가가 진행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의 「그날이 오면」의 해설은 1995년 단편소설 「떠오르는 섬」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고은주 작가가 진행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의 「그날이 오면」의 해설은 고은주 작가가 진행했다. 1995년 단편소설 「떠오르는 섬」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녀는 소설집 「칵테일 슈가」, 장편소설 「여자의 계절」, 동화 「너는 열두 살」 등을 출간했다. 또한, 고은주 작가는 〈1999 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2019 노근리평화상 문학상〉, 〈2019 이화문학 푸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국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확신을 나타낸 심훈의 「그날이 오면」

심훈의 「그날이 오면」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조선의 현실과 훼손되어 가는 민족 문화를 되찾고자 조국 독립의 염원을 노래한 저항시로 조국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의 「그날이 오면」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조선의 현실과 훼손되어 가는 민족 문화를 되찾고자 조국 독립의 염원을 노래한 저항시로 조국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의 「그날이 오면」은 일제에 의해 파괴된 조선의 현실과 훼손되어 가는 민족 문화를 되찾고자 조국 독립의 염원을 노래한 저항시로 조국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심훈은 안타깝게도 1936년 서른다섯에 요절하여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심훈이 이 시를 쓴 것은 1930년이었으나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하고, 해방 후인 1949년 동명의 시집이자 이 시가 표제시로 쓰인 「그날이 오면」이 출판되면서 비로소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광복의 그날을 보지 못한 채 조국을 위해 살다 간 그의 업적과 문학적 업적은 그의 대표작 「상록수」처럼 늘 푸르게 기억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이자 시의 첫 구절인 ‘그날이 오면’이라는 구절은 우리 국민에게는 민중가요의 제목 등 상징처럼 쓰이고 있다. ‘그날이 오면’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날’이라고 표현했지만, 광복 이후 ‘그날’의 의미가 확장되면서 시의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

시의 첫 부분에서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상황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쁜 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단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려서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거나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멘다는 표현들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시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산이 일어나 춤추고 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치는 구절은 이 시의 세계를 끌고 나가는 힘을 담은 가장 강렬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또한 ‘그날이 오면’ 이렇게 하겠다는 단순한 가정법으로 광복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뿐만 아니라, ‘그날이 와서’ ‘울며 뛰며 뒹굴어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이렇게 하겠다는 식으로 ‘그날’이 이미 도달한 상황까지 가정함으로써 해방에 대한 확신도 표현했기 때문에 그 시대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심훈 시인의 작품세계 근간은 저항 의식이겠지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넘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은 더욱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심훈 작가의 생애와 작품이 현시대에 주는 의미

심훈은 저항주의 작가, 농촌계몽주의 작가라 하여 단편적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심훈은 그의 생애에 시와 소설, 시나리오, 수필 등 다양하게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언론·영화 등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예술인이다. 사진/ 심훈기념관
심훈은 저항주의 작가, 농촌계몽주의 작가라 하여 단편적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심훈은 그의 생애에 시와 소설, 시나리오, 수필 등 다양하게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언론·영화 등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예술인이다. 사진/ 심훈기념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 돌집(현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난 심훈의 본관은 청송(靑松), 이름은 대섭(大燮), 호는 해풍(海風), 필명은 훈(熏)이다.

심훈은 저항주의 작가, 농촌계몽주의 작가라 하여 단편적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심훈은 그의 생애에 시와 소설, 시나리오, 수필 등 다양하게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언론·영화 등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예술인이다.

심훈의 생애를 되짚어 볼 때 그의 문학적 출발은 3·1 만세운동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탓으로 심훈은 감옥살이하면서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이라는 편지글을 썼다. 출옥 후, 감방에서의 체험을 살려 「찬미가에 싸인 원혼」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현전하는 심훈 작품 중 최초의 소설이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글월」에서 묘사된 노인의 임종 부분이 「찬미가에 싸인 원혼」에서는 중심 사건이 되어 소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작품은 심훈 문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것으로 3·1 만세운동의 경험은 이후 심훈이 추구한 예술 활동의 기본정신으로 작용한다.  

1920년 심훈은 중국으로 유학을 하게 된다. 북경과 상해를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한다. 중국에서 그는 단채 신재호, 우당 이회영을 비롯하여 여운형과 박헌영, 이동녕과 이시영 등 다양한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였다. 3·1 만세운동과 더불어 중국 유학은 심훈이 의식에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되어, 훗날 심훈은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의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귀국해서 심훈은 다양한 문학단체 활동을 한다. 지강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극문회’를 조직하고, ‘염군사’에서 ‘카프’로 이어지는 조직에도 몸을 담았다. 또한 라디오 방송극 연구회에 가담하여 방송극을 연구하고 각색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하면서 번안 소설 「미인의 한」의 후반부 번역을 담당하고, 1926년에는 영화소설 「탈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심훈은 「탈춤」을 실제로 영화화할 계획으로 이 작품을 시나리오로 각색하였는데, 제작단계에서 재정난으로 영화는 무산되었다. 이에 심훈은 영화배우 강홍식과 함께 일본 교토의 나카츠촬영소로 영화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돌아와서는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직접 쓰고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극’과 ‘영화’는 매우 대중적인 장르로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심훈이 점차 대중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작가 의식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심훈은 시도 꾸준히 창작하였다. 심훈의 시는 육필원고 64편, 유고 시집 65편, 전집1에 77편이 있다. 일기에 수록된 3편을 포함해 지금까지 발견된 심훈의 시는 총 85편이다.

심훈은 시에서 시대에 대한 울분과 무력함을 표출하는 한편 현실을 회피하고자 방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작품 행보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띤다.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사조로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없는 세계를 동경함으로써 현실은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곳이 되고 현실에 대한 ‘저항’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심훈은 한설야와 임화 등 카프 계열 작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이후 심훈은 시대 현실에 대해 성찰하고 문학적 형식을 정립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심훈의 문학 창작과정의 특징은 그의 작품이 대부분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소설을 창작할 때도 주변 인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작품의 모델로 삼아 서사화하면서 시대적 공감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심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화와 역사 유적지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한 ‘사육신묘 공원’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류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한 ‘사육신묘 공원’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류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문학기행의 첫 방문지는 ‘사육신묘 공원’.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한 이곳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류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1681년 숙종이 사육신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서 '민절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총면적 4,940㎡에 33종 15,000주의 수목으로 조경된 사육신묘 공원에는 사당인 의절사, 홍살문, 삼 문(불이문), 육각 비, 신도 비 등이 있다. 신도비 비각과 마주 보고 있는 육각형의 사육신 비는 1955년에 세워진 것이다.

용양봉저정’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방문하는 화성행궁 시에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오가며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노들나루에 도착한 정조를 위해서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는 동안 어가가 머물러 쉴 자리가 필요해 근처에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정자 이름을 "북쪽에 우뚝 선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 기반을 의미하는 듯하다"라며 ‘용양봉저정’이라 지었다. 이 정자는 아직도 한강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효사정’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속공 노한의 별서였다. 사진/ 김효설 기자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효사정’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속공 노한의 별서였다. 사진/ 김효설 기자

그다음에 찾아간 곳은 효사정 길을 따라서 펼쳐진 학도의용병 현충 비. 심훈 공원 입구에 있는 학도의용병 현충 비는 한국전쟁 시 3사단에 참전한 학도병의 애국심을 기리고 고취하기 위해서 3사단 김석원 사단장이 세운 비로 당시 전쟁에 참여한 어린 71명의 학도병 중 48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학도의용병 현충 비를 지나자 심훈 공원이 이어진다. 산책로를 따라서 펼쳐지는 심훈의 일대기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심훈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서 심훈의 일대기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도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서 심훈의 일대기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도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 공원을 지나면서 영화감독이자 배우로도 출연한 ‘장한몽’과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3위를 한 남승룡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오오, 조선의 남아여! 등에 대한 소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은 심훈의 좌상, ‘그날이 오면’ 시비 등을 볼 수 있다.

이어 도착한 ‘효사정’은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속공 노한의 별서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다. 옛 효사정은 사라졌고, 1993년 흑석동 한강 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한강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심훈의 둘째 아들 심원섭의 고증으로 세워진 심훈의 생가터. 천주교 흑석동 성당의 입구에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의 둘째 아들 심원섭의 고증으로 세워진 심훈의 생가터. 천주교 흑석동 성당의 입구에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마지막으로는 심훈의 둘째 아들(심원섭)에게 고증받아서 세운 생가터를 찾았다. 천주교 흑석동 성당의 입구에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당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하였다.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영화 <먼동이 틀 때>, 시 <그날이 오면>, 소설 <상록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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