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기행, 신동엽 ‘종로5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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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신동엽 ‘종로5가’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2.07.22 2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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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붕괴와 농촌을 떠나온 도시 빈민의 고통과 비애 담아
신동엽 시인은 「종로5가」를 통해서 근대화를 향해서 치닫던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시 빈민의 우울하고 슬픈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진은 창신동. 사진/ 김효설 기자
신동엽 시인은 「종로5가」를 통해서 근대화를 향해서 치닫던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시 빈민의 우울하고 슬픈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진은 창신동.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세 번째 여행지는 민중의 저항 의식을 시화(詩化)한 신동엽 시인의 「종로5가」. 신동엽 시인은 「종로5가」를 통해서 근대화를 향해서 치닫던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시 빈민의 우울하고 슬픈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1960년대 대표적 민족시인 신동엽의 「종로5가」의 해설자로는 박미산 시인이 나섰다. 2008년 「너와 집」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1960년대 대표적 민족시인 신동엽의 「종로5가」의 해설자로는 박미산 시인이 나섰다. 2008년 「너와 집」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이번 문학기행은 치열한 현실 의식과 역사의식, 투철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펼친 1960년대 대표적 민족시인 신동엽의 「종로5가」. 해설자로는 박미산 시인이 나섰다. 2008년 「너와 집」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그녀는 2014년 조지훈 창작지원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시, 잠자는 나를 깨우다」 등이 있다. 현재는 문화공간 〈백석, 흰 당나귀〉에서 ‘수요문화 강좌’와 ‘수요 시 토크’를 진행하고 있다.

신동엽은 1959년에 등단하여 만 10년 동안 활동하다 39세에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과 4·19의 한복판을 관통한 시 정신은 이후 세대들에게 산업사회의 너머를 꿈꿀 대안적 상상력의 모델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왔다.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사회에서 그가 저항시인으로서 자리하고자 했던 존재방식, 창작 실제에서 거둔 미적 형식 또한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왔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시인 신동엽은 비극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미래를 낙관하였다. 그래서 그의 좋은 언어는 언제나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신동엽,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다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신동엽문학관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신동엽문학관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1944년 부여국민학교(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한다. 이후 단국대학교에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으며, 1953년에 졸업했다. 1950년 국민방위군에 징집되었고, 1951년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픈 나머지 를 함부로 먹었다가 디스토마에 감염되었는데, 이는 그의 요절의 원인이 되었다.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신동엽은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운영했다. 사진은 헌책방이 있었던 성신여대 1번 출구. 사진/ 김효설 기자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신동엽은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운영했다. 사진은 헌책방이 있었던 성신여대 1번 출구. 사진/ 김효설 기자

1953년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의 자취방에 살다가 돈암동 네거리에서 친구의 헌책방을 운영했다.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인병선을 만났고 1957년 결혼했다. 결혼한 그 해인 1957년, 인병선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수학하는 대신 가난한 시인과의 삶을 택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그리고 신동엽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갔다. 인병선은 부여에서 양장점을 열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신동엽은 충남 보령시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1959년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교편에서 물러난 후 처와 자식들을 다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처가로 돌려보냈다. 자신은 부여에서 요양하며, 글에 집중한다.

1959년 1월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하여 본격적으로 시와 산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4·19 혁명의 격동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담은 문학 작품을 모아 학생 혁명시집을 펴내기도 한다.

1969년 지병인 간 디스토마로 간암이 악화하여,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을 남겨둔 채, 4월 7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 38세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부여읍 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사진/ 신동엽문학관
1969년 지병인 간 디스토마로 간암이 악화하여,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을 남겨둔 채, 4월 7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 38세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부여읍 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사진/ 신동엽문학관

1960년부터 다시금 건강이 좋아진 신동엽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며, 이때 교육평론사에 입사한다. 이번엔 돈암동이 아니라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해 4월,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혁명에 뛰어든다.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를 창작했다.

1961년부터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1963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 18편을 수록한 시집 「아사녀」를 발간한다. 주말마다 산행했던 그는 1967년 “향그러운 흙가슴”을 바라며 <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하고, 그해 펜클럽 작가기금 5만 원을 받아 1968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한다.

<금강>의 집필을 위해 방학 때면 호남을 여러 번 답사하고, 설악산과 속리산 등을 찾아가 동학의 유적을 추적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과거를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쓰면서 평화공동체의 미래를 구상한 ‘과거-현재-미래’라는 새로운 역사의 청사진이다.

39세가 되던 1968년에는 오페레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 센터에서 공연하는 한편 <그 사람에게>, <봄은>, <산문시>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신동엽은 <금강>에 이어 <임진강>이라는 또 다른 장편서사시를 쓰려고 계획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하고, 1969년 지병인 간 디스토마로 간암이 악화하여,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을 남겨둔 채, 4월 7일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 38세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묘지는 처음엔 당시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했다가, 1993년에 고향인 부여군의 능산리 고분군 근처 산으로 이장했다. 사후 부여읍 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하고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한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당대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표현한 신동엽의 「종로 5가」

신동엽의 '종로 5가'는 노동자인 화자와 종로 5가 신호등 앞에서 동대문을 묻는 한 소년의 만남을 통해 당대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은 동대문. 사진/ 김효설 기자
신동엽의 '종로 5가'는 노동자인 화자와 종로 5가 신호등 앞에서 동대문을 묻는 한 소년의 만남을 통해 당대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표현하고 있다. 사진은 동대문. 사진/ 김효설 기자

신동엽의 「종로5가」는 1960년대 거대한 외세 자본에 의한 근대화·산업화로 농촌이 피폐하고 해체되어 농민들이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는 민중들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현실 비판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이 시는 노동자인 화자와 종로 5가 신호등 앞에서 동대문을 묻는 한 소년의 만남을 통해 당대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표현하고 있다. 1960년대 농민의 희생과 농촌의 붕괴를 담보로 진행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지만, 도시 노동자나 창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노동으로 지친' 화자의 눈에 비친 현실은 '이슬비'가 오고 또 그 '비에 젖고 있는' 상황처럼 침울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화자는 농촌에서 막 올라와 도시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소년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이처럼 이 시는 농촌을 떠나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시로 왔지만,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민중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그려 내고 있다.

이 시의 5~6연은 이 시의 화자가 언젠가 보았던 창녀와 막노동자의 모습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화자는 그들을 소년의 가족으로 가정하고 있다. 화자는 '부은 한쪽 눈의 창녀'와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가 겪는 개인적 비극의 원인을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를 둘러싼 세 개의 외세, 즉 '대륙'으로 표현된 중국, '섬나라'로 표현된 일본, 막강한 자본을 가진 '새로운 은행국'인 미국으로 보고 있다. 즉, 외세 자본의 침략과 외세 의존적 권력을 비극적 현실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화자의 비판적 현실 인식은 결국 화자가 민중이 힘든 삶을 살았던 '이조 오백 년'과 지금의 현실이 다를 바가 없으며, 가난을 위해 '북간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일제 강점기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동대문에서 창신동, 낙산, 이화동, 돈암동으로 이어지는 추억 속의 서울

창신동 봉제거리는 1960년대 신동엽이 시의 소재로 삼은 많은 누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와서 일하던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창신동 봉제거리는 1960년대 신동엽이 시의 소재로 삼은 많은 누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와서 일하던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서울은 신동엽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선생님으로서 존재했던 공간이다. 그 당시 서울은 신동엽에게 버거울 만큼 힘든 곳으로, 그는 그만의 시각으로 서울을 바라보며 여러 편의 시를 써 내려 갔다. 신동엽의 피폐한 서울살이를 추억하며 찾아간 곳은 창신동 봉제역사관 이음피움, 낙산, 성북천, 신동엽 책방, 신동엽 집터를 찾아가는 일정이었다.

집결지인 동대문역에서 나와 가파른 언덕과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펼쳐지는 창신동 봉제거리로 향했다. 예전만큼 복잡하지 않지만, 여전히 원단을 싣고 나르는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듯 골목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창신동은 근대화의 상징이자 도시재생의 사례를 보여주는 곳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70~8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곳은 1960년대 신동엽이 시의 소재로 삼은 많은 누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와서 일하던 곳이다. 창신동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미싱을 돌려서 그 돈을 고향에 보내 부모님과 동생들을 돌보던 곳이다. 누이들이 보내준 돈으로 동생들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부모님은 배고픔을 면하던 그 시절의 이곳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봉제역사관 ‘이음피움’은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 제조업으로 7, 80년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봉제산업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는 도심 속 문화역사 공간으로 봉제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봉제역사관 ‘이음피움’은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 제조업으로 7, 80년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봉제산업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는 도심 속 문화역사 공간으로 봉제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골목 사이를 지나 언덕에 오르니 봉제역사관 ‘이음피움’이 나타난다.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 제조업으로 7, 80년대 산업화를 이끌었던 봉제산업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는 도심 속 문화역사 공간으로 봉제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창신동에서 언덕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곳은 낙산공원. 낙산공원은 대학로와 동대문으로 이어지며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대학로에서 낙산공원에 올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 전망을 보고, 언덕 정상 부위에 밀집한 주택과 벽화가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로 갈 수도 있다.

또 흥인지문에서 한양 도성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대문 방면 코스는 성곽을 따라 한적한 도심 속 숲길을 걸을 수 있다. 한성대 입구 방면으로부터 올라가는 길은 외부 성곽 벽면 전체를 보면서 걸을 수 있어 오랜 과거로의 여행 같은 느낌을 주고, 정상에 올라 북동 방향의 서울 전경을 볼 수도 있다.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은 마을 곳곳에 있는그림과 조형물이  TV 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은 마을 곳곳에 있는그림과 조형물이 TV 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은 2006년 낙후된 마을을 대상으로 시작된 도시예술 캠페인의 하나인 ‘낙산 프로젝트’가 진행된 곳으로 이화동과 동숭동 일대에 주민과 예술인, 대학생과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이화마을 곳곳에 그림과 조형물이 탄생하였다. 이후 TV 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사생활 침해를 포함하여 과도관광(overtourism)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은 2016년 4월, 일부 벽화를 철거하였다. 2013년에 보수공사를 진행한 꽃 계단과 물고기 계단은 이화 벽화마을에서 가장 유명하였으나, 회색 페인트로 덧칠되었다.

성북천으로 가는 길에 만난 서울한양도성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내사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여 쌓은 약 18.2km의 성곽이다.

한양 도성길 낙산 구간은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2.1km 구간이다. 성곽 바로 옆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한양 도성길 낙산 구간은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2.1km 구간이다. 성곽 바로 옆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한양 도성길 낙산 구간은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2.1km 구간이다. 성곽 바로 옆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으며, 가톨릭대학 뒤편에는 축조 시기별로 성 돌의 모양을 관찰할 수 있다.

낙산성곽길을 따라서 가면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체험마을, 장수마을을 만난다. 60세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 불린다. 한성대와 서울성곽 사이에 끼인, 장수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판자촌이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장수길이 안쪽 가장자리에 있다. 좌측 길옆에는 삼선공원, 우측 길옆에는 서울성곽과 낙산공원이 있다. 삼선공원 내에는 조선 말기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의 중심 건물 총무당이 있다.

장수마을을 지나 도착한 성북천은 상류 구간으로 성북동을 지나는 구간이다. 성북구 일대를 지나는 성북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돈암동, 보문동 일대를 지나 용두동에서 청계천과 합쳐진다.

성북천의 상류 구간은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업의 수단인 마전터, 아낙네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놀이터 등으로 이용된 성북동 사람들의 중심 생활공간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성북천의 상류 구간은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업의 수단인 마전터, 아낙네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놀이터 등으로 이용된 성북동 사람들의 중심 생활공간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성북천의 상류 구간은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업의 수단인 마전터, 아낙네들의 빨래터, 아이들의 놀이터 등으로 이용된 성북동 사람들의 중심 생활공간이었다. 또한, 이태준, 조지훈 등 근현대 예술인들이 성북동 개천 주변에 거주하였다. 1970~1980년대 성북천 복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성북천 상류 구간의 물길 대부분은 성북로로 이어지고 있다.

성북천변에는 상류의 도란도란 교부터 마지막 성북천교까지 20여 대의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 밑 그늘에서 신동엽의 서울살이에 대한 해설을 듣고 찾아간 곳은 성신여대 1번 출구. 서울로 올라온 신동엽이 돈암동 네거리 한 귀퉁이 친구의 헌책방이다. 현재는 자취조차 없지만, 여기서 소설가 현재훈과 아내 인병선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성북구 아리랑로4가길 13(동선동5가 45)에 위치한 신동엽의 집터. 신동엽 시인은 이 집에서 1962년부터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들과 생활하였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성북구 아리랑로4가길 13(동선동5가 45)에 위치한 신동엽의 집터. 신동엽 시인은 이 집에서 1962년부터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들과 생활하였다. 사진/ 김효설 기자

마지막으로 성북구 아리랑로4가길 13(동선동5가 45)에 위치한 신동엽의 집터로 갔다. 신동엽 시인은 이 집에서 1962년부터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들과 생활하였다. 1956년에 인병선과 결혼하고 1959년에 상경하면서 돈암동에 전세방을 얻었으며 1962년에 인병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한옥을 마련하였다. 이 집에서 첫 시집 『아사녀(阿斯女)』(1963)를 발표하였다. 현재 한옥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며 2006년에 지어진 4층짜리 빌라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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