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기행, 이문구 장편소설 ‘장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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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이문구 장편소설 ‘장한몽’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2.08.09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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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공동묘지 이장 공사에 몰려든 사람들의 밑바닥 삶을 통해 현대 한국인이 지닌 비극 묘사
작가 이문구는 「장한몽」을 통해서 변두리 공동묘지 이장 공사에 몰려든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우리말 고유의 가락을 살려낸 예스러우면서도 해학적인 문장으로 묘사했다. 사진은 공동묘지 터였던 연희초등학교 뒤편. 사진/ 김효설 기자
작가 이문구는 「장한몽」을 통해서 변두리 공동묘지 이장 공사에 몰려든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우리말 고유의 가락을 살려낸 예스러우면서도 해학적인 문장으로 묘사했다. 사진은 공동묘지 터였던 연희초등학교 뒤편.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네 번째 여행은 토속적이며 현실 밀착형 소설가인 이문구의 장편소설 「장한몽」의 배경을 찾아 서울 마포와 신촌 일대를 돌아보았다. 작가 이문구는 「장한몽」을 통해서 변두리 공동묘지 이장 공사에 몰려든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우리말 고유의 가락을 살려낸 예스러우면서도 해학적인 문장으로 묘사했다.

「장한몽」의 해설은 이소영 동화작가(왼쪽)가 소설과 인문 부문의 프리뷰 강의를 박정아 숭실대 교수(오른쪽)가 코스 해설을 맡았다. 사진/ 김효설 기자
「장한몽」의 해설은 이소영 동화작가(왼쪽)가 소설과 인문 부문의 프리뷰 강의를 박정아 숭실대 교수(오른쪽)가 코스 해설을 맡았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이문구의 장편소설 「장한몽」의 해설은 이소영 동화작가가 소설과 인문 부문의 프리뷰 강의를 박정아 숭실대 교수가 코스 해설을 맡았다. 이날 진행된 문학기행의 코스는 당인리발전소, 공민왕 사당, 와우공원, 경의선 숲길, 신촌역, 옛 신천동 공동묘지 터인 연희초등학교 등을 돌아보았다.

「장한몽」의 줄거리는 한국전쟁 이후 브라운이라는 외국인이 서울 변두리에 학교법인 한성학원을 세우기 위해 부지를 찾다가 일제 강점기에 한 선교사의 소유지였으나, 말레이시아로 이주해 버려지다시피 한 산을 발견하고 명의를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주인이 관리하지 않았던 이 산에는 그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묘를 써왔고 무허가 판잣집들도 들어선 상태였다. 주인공 김상배가 이 산에 있는 묘지의 이장공사를 맡게 되면서 인부를 모으고 일해 나가는 이야기다. 시신 파내는 작업을 하러 모인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바쁜 사람들, 직업의 귀천이 너무도 명백하게 존재했던 시절 가장 천한 일을 하러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자의 과거, 상처, 사연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며, 고난을 겪었던 서민들의 삶을 작가 이문구만의 특유한 토속어 구사와 해학적 대화로 전통적인 한국인의 심상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가 이문구,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예지 ‘현대문학’에 등단

196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이문구는 대학 시절 은사였던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5년 9월 문예지 ‘현대문학’에 ‘다갈라 불망비(不忘碑)’, 이듬해 7월 동지에 ‘백결(百結)’을 게재하고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한다.
196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이문구는 대학 시절 은사였던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5년 9월 문예지 ‘현대문학’에 ‘다갈라 불망비(不忘碑)’, 이듬해 7월 동지에 ‘백결(百結)’을 게재하고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한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는 1941년 충남 보령시 대관동 갈머리(冠村)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명천(鳴川).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형들을 잃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15세에 가장이 되었다. 1959년 중학교를 마친 후 바로 상경해 막노동과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196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시절 은사였던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5년 9월 문예지 ‘현대문학’에 ‘다갈라 불망비(不忘碑)’, 이듬해 7월 동지에 ‘백결(百結)’을 게재하고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한다.

이후 「지혈(地血)」(1967.1), 「이삭」(1968.7), 「김탁보전」(1968.4), 「이 풍진 세상을」(1970.8), 「암소」(1970.10)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첫 장편소설인 「장한몽」(1970.12~1971.9)으로 1973년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중편소설 「해벽」(1972.2)과 대표작으로 알려진 연작소설 「관촌 수필」(1972~1977)과 「우리 동네」(1977~1981)를 집필한 후, 「산 너머 남촌」(1990), 「토정 이지함」(1989), 「매월당 김시습」(1992) 등을 발간했다.

나무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단편 모음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1990년대 이후의 영악해진 농민과 삭막해진 농촌풍경을 각기 다른 양태를 지닌 나무에 비유해 정감 있는 토속어로 맛깔스럽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의 문학과 인생역정의 또 다른 표현으로 평가되는 마지막 소설집인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2000)로 제31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문구는 작가 생활 내내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작품화한 작가로 손꼽힌다. 대표작으로는 ‘장한몽’을 비롯해 연작소설 ‘관촌수필’(1977), ‘우리 동네’(1981), ‘유자소전’(1993) 등이 있다. 2003년 지병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38년간 이문구는 소설은 물론 신문과 동시, 콩트까지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창작활동을 펼치며 한국 문학사에서 고유한 입지를 구축했다.

한국일보문학상(1972), 한국문학작가상(1978), 요산문학상(1990), 펜문학상(1991), 만해문학상(1993), 동인문학상(2000)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이문구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1974~1984),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1977~1997),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1987~1988),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1995~1997),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1998~1999),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1999~2001)을 역임하는 등 문단과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3년 지병인 위암으로 별세했을 때, 한국 문단 사상 최초로 문학 4단체(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합동 문인장을 치렀다.

이문구의 첫 장편소설 ‘장한몽’

이문구의 소설 ‘장한몽’은 잡지 ‘창작과 비평’에 1970년 겨울호부터 1971년 가을호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된 약 2,700장 분량의 장편으로 발표 당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문구의 소설 ‘장한몽’은 잡지 ‘창작과 비평’에 1970년 겨울호부터 1971년 가을호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된 약 2,700장 분량의 장편으로 발표 당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문구의 소설 ‘장한몽’은 잡지 ‘창작과 비평’에 1970년 겨울호부터 1971년 가을호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된 약 2,700장 분량의 장편으로 발표 당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장편 장한몽의 판본은 네 개가 존재한다. 창작과 비평 연재본과 1973년에 간행된 삼성출판사본 장한몽(상·하) 그리고 1987년에 개작된 책세상본 장한몽, 마지막으로 2004년 ‘이문구 전집 4·5’로 나온 랜덤하우스중앙본 장한몽(상·하)이 있다. 이 중 창작과 비평 연재본과 삼성출판사본은 동일하다. 책세상본은 이문구가 전체적으로 문장을 손질하고 분량을 줄인 것인데, 랜덤하우스중앙본 전집은 이문구 사후 간행되었다. 삼성출판사본은 단행본으로 발간된 최초의 판본이다.

이 소설 ‘장한몽’은 작가 이문구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 작품 완성 후 ‘관촌수필’의 연작 세계와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우리 동네’의 연작 세계를 선보이게 되는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문구는 6·25전쟁으로 인해 졸지에 가족을 잃고 상경해 마포와 신촌 일대에서 행상과 잡역부 생활을 오랫동안 해야 했다. 1965년 가을에는 동네 사람의 권고로 공동묘지 이장일을 경험했던 이문구의 실제 삶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장한몽’은 1960년대 서대문구 신천동 산 5번지에 있는 공동묘지를 배경으로 해 닷새간에 걸쳐 2,000여 기의 무덤을 광주군 명주리로 옮기는 이장공사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땅 주인인 브라운이 공동묘지 자리에 학교를 조성하기 위해 이장공사를 시작하고 현장감독으로 김상배가 부임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전쟁 때문에 형과 아버지를 잃고 상경한 김상배는 경제적 무능력자로 돈놀이하는 장모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주눅이 들어 산다. 무위도식하던 중 옛 친구 신성식의 도움으로 신천동 산 5번지의 2천 기가 넘는 분묘를 다른 공동묘지로 옮기는 이장공사를 맡게 된다. 그는 지나친 현실 적응 능력이 오히려 화가 되어 막노동판에까지 나서게 된 마길식의 도움을 받아 공사 인부를 모집한다.

마길식은 월남파병 때에 밀주 장사를 하다가 들켜서 강제 송환된 경험이 있다. 모여든 인부들은 모두 묘를 이장하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막판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에 남의 원한을 사서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한평생 밀려오는 불안감과 죄책감에 숨어 살아온 구본칠, 백정이었던 신분 때문에 고향을 떠나 월남하여 도시 밑바닥 삶을 살아온 유한득, 그의 아우 차득과 삼득, 누이동생 초순 등이 등장한다. 7남매의 가장 노릇을 하느라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악착같이 사는 왕순평, 동회 서기직을 해본 적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불평 주의자 이상필, 교회 권사였다고 주장하면서 포장마차를 하는 것이 소원인 박원달 영감 등이 나온다.

그밖에 절간의 머슴 노릇을 하다가 강간미수로 산에서 도망쳐 나와 공동묘지에 간이 화장터를 차리고 유골을 처리해주는 것으로 호구를 잇는 모일만, 아들을 못 낳는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지신이 죽어야 집안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무당의 사주 때문에 학대받는 최미실 등이 등장한다.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의 유골에서 금붙이를 탈취하는 것, 사기그릇을 모으는 것, 비속어, 함축적 대사 등으로 냉정하게 사실을 묘사해 끈끈하고 얼기설기 얽힌 삶의 편린들을 다양하게 펼쳐 보인다.

공동묘지 이장공사가 무사히 끝나는 순간, 주인공 김상배가 득남하였다는 연락이 오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당인리발전소에서 시작된 문학기행 코스

소설 ‘장한몽’에는 주인공 김상배와 10여 명의 인부의 행적에 따라 1960년대 마포와 신촌 일대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소설 ‘장한몽’에는 주인공 김상배와 10여 명의 인부의 행적에 따라 1960년대 마포와 신촌 일대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사진은 1980년 5월 지하철 2호선 신촌역 공사현장.

소설 ‘장한몽’에는 주인공 김상배와 10여 명의 인부의 행적에 따라 1960년대 마포와 신촌 일대의 풍경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와우산, 마포강(마포 앞의 한강), 신촌시장, 아현시장, 모래내, 염리동, 신촌 로터리, 노고산 일대, 동교동 골목, 이대 앞 대흥극장, 대한일보사 뒷골목, 신영극장, 신촌 역전이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당시 서울의 변두리였던 이들 공간은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문구의 ‘장한몽’ 문학기행의 코스는 당인리발전소, 공민왕 사당, 와우공원, 경의선 숲길, 신촌역, 옛 신천동 공동묘지 터인 연희초등학교로 이어졌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당인리발전소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화력발전소로 소설 속에서 “밤이 되면 공동묘지에서는 연희동 기독교방송국 송신탑과 당인리발전소 송전탑 적신호등만이 보일 뿐이다.”라고 서술한다. 1929년 6월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건설하여 1930년 1호기를 시점으로 1971년 4-5호기까지 엄청난 발전이 있었던 곳이다. 최근 들어 기존의 당인리발전소의 4, 5호기를 폐기하고 연면적 24,266㎡의 부분을 활용하여 새로운 유형의 문화예술공간이자 도시재생 공원으로 조성됐다. 이로써 홍대문화거리의 상권이 이곳 당인리 발전소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민왕 사당, 광흥창터

서울 마포구 독막로21길 13번지에 있는 공민왕 사당은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던 창고 터로 ‘광흥창 터’에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서울 마포구 독막로21길 13번지에 있는 공민왕 사당은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던 창고 터로 ‘광흥창 터’에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서울 마포구 독막로21길 13번지에 있는 공민왕 사당은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던 창고 터로 ‘광흥창 터’에 있다. 조선시대 초 서강 일대에 양곡 보관 창고를 지으려 할 때 서강 나루의 곡물창고에 근무하던 창고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에 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낼 것을 계시하였다. 이에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봉제를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의 와우산, 와우공원

와우공원은 와우산 북쪽에 조성된 공원으로 시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휴식 공간으로 와우정이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와우공원은 와우산 북쪽에 조성된 공원으로 시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휴식 공간으로 와우정이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와우산은 마포구 서강동에 있는 높이 101.9m의 동네 언덕 수준의 산으로 서교동까지 이어진다. 무악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소가 누운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몰미산이라고도 한다. 서남쪽으로 뻗은 산세로 산의 서쪽은 마포구 상수동이며 동쪽은 마포구 창전동이다. 서쪽에는 홍익대학교가 남쪽에는 서강초등학교가 있다.

또한, 와우산은 1970년 4월 8일 새벽, 와우산에 지었던 지상 5층, 15개 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준공된 지 석 달 만에 무너져 내려 아파트 주민 33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있었던 곳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와우공원은 와우산 북쪽에 조성된 공원으로 시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휴식 공간으로 와우정이 있다.

버려진 철길이 숲길로 탈바꿈한 경의선 숲길

경의선 숲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철길이었다. 경의선 철도가 지하로 내려가면서 철로가 지나가던 연남동과 가좌역 일대를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숲길로 탈바꿈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경의선 숲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철길이었다. 경의선 철도가 지하로 내려가면서 철로가 지나가던 연남동과 가좌역 일대를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숲길로 탈바꿈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경의선 숲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철길이었다. 경의선 철도가 지하로 내려가면서 철로가 지나가던 연남동과 가좌역 일대를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숲길로 탈바꿈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경의선 숲길 공원’이다.

철길을 그대로 살린 것이 공원의 포인트로 공원 조성 후 양옆의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과 카페, 소품을 파는 가게들이 생겨나면서 서울의 ‘뜨는 상권’으로 주목받고 있다.

홍대입구역 근처 연남동 구간은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와 닮았다 하여 ‘연트럴 파크’라 불린다. 이곳에는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프렌차이즈’ 상가들을 찾기 힘들고, 개성 넘치는 독특한 분위기의 상가들이 줄지어 있다.

서울역보다 5년이나 앞서 건설된 구 신촌역사

구 신촌역사는 1921년에 세워져 옛 서울역 건물보다 5년이나 앞서 건설된 것으로 1920~30년대의 조적법 목재지붕틀, 창호, 굴뚝 등의 원형이 잘 남아 있으며, 국가등록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구 신촌역사는 1921년에 세워져 옛 서울역 건물보다 5년이나 앞서 건설된 것으로 1920~30년대의 조적법 목재지붕틀, 창호, 굴뚝 등의 원형이 잘 남아 있으며, 국가등록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서울역과 가좌역 사이에 있는 구 신촌역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 건물로 유명하다. 구 신촌역사는 1921년에 세워져 옛 서울역 건물보다 5년이나 앞서 건설된 것으로 1920~30년대의 조적법 목재지붕틀, 창호, 굴뚝 등의 원형이 잘 남아 있으며, 국가등록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됐다. 그 후, 2006년 7월 12일 기존 역사의 뒤편에 민자역사가 신축되어 역무실 부분을 철거하고 반대편으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민자역사는 수도권 전철 경의선 개통과 함께 전철역으로 전환되었다.  

공동묘지 현장, 연희초등학교 뒤편

공동묘지 현장은 작품 속에서 ‘신천동 산 5번지’로 설정돼 있는데, 이곳은 연희초등학교 뒤편의 외국인학교 터 근처로 짐작된다. 사진/ 김효설 기자
공동묘지 현장은 작품 속에서 ‘신천동 산 5번지’로 설정돼 있는데, 이곳은 연희초등학교 뒤편의 외국인학교 터 근처로 짐작된다. 사진/ 김효설 기자

공동묘지 현장은 작품 속에서 ‘신천동 산 5번지’로 설정돼 있는데, 이곳은 연희초등학교 뒤편의 외국인학교 터 근처로 짐작된다. 실제로 이문구는 이곳에서 수천 기에 이르는 묘를 이장한 경험이 있다고 증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공동묘지와는 거리가 먼 번화하고 세련된 곳이지만, 작품 속의 신천동 공동묘지는 본래 100기 정도였던 조그만 공동묘지였으나, 6·25 이후 불법적으로 조성된 2,000여 기의 무덤과 무허가 판잣집들이 널려 있는 황량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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