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기념, 가볼만한 역사 현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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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기념, 가볼만한 역사 현장은?
  • 김지현 기자
  • 승인 2019.02.25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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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역사 현장 8곳 소개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그날의 함성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 서울시

[트래블바이크뉴스=김지현 기자]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은 봉건 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왕토를 국토로, 백성을 국민으로 탄생시킨 역사적 혁명이다. 100년이 흐른 지금, 역사의 현장을 찾아 그날의 함성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독립운동 테마 역사(驛舍)로 탈바꿈한 ‘안국역’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 북촌과 인사동 등을 잇는 거점으로 인근에 여운형, 손병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집터가 있다. 사진은 독립운동 테마 역으로 꾸민 안국역. 사진/ 서울사랑

안국역에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 북촌과 인사동 등을 잇는 거점으로 인근에 여운형, 손병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집터가 있다. 이를 기념해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안국역을 독립운동 테마 역으로 꾸몄다.

안국역 4번 입구에 설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대문을 표현한 ‘100년 하늘문’을 비롯해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을 조성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100초 동안 만날 수 있는 그래픽 ‘100년 기둥’이다.

지하 4층 승강장에는 스크린 도어와 대기 의자에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어록을 기록해놓았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이봉창 등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차량 칸마다 다른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3·1운동의 중추 ‘천도교 중앙대교당’

인사동 삼일대로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 교당은 3·1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다. 사진/ 서울사랑

3·1운동 배후에는 종교계의 막강한 지원도 있었다. 인사동 삼일대로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 교당도 그중 한 곳. 당시 천도교는 ‘척왜(斥倭)’를 외치던 동학의 후신으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3·1운동 중심에 서 있었다.

천도교 제3대 교조 손병희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1918년 중앙대교당 설립이라는 명목 아래 성금을 걷었다. 이 중 일부를 중앙대교당 건축에 쓰고 나머지는 3·1운동 자금으로 쓰는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군 운용 자금으로 보냈다.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문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보관했다가 3·1운동 당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다.

3·1운동 주역인 학생들의 아지트 ‘승동교회’

인사동 골목 안에 100년 넘은 오래된 예배당, 승동교회가 있다. 1993년 ‘3·1독립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교회 마당 한편에 3·1독립운동기념 터 표지석을 세웠다. 사진/ 서울사랑

인사동 거리로 접어드는 초입에 100년 넘은 오래된 예배당, 승동교회가 있다. 인사동 골목 안에 있어 눈에 띄지 않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북적이는 인사동과 달리 고요하고 고풍스러운 외관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다. 1912년 지은 승동교회는 3·1운동의 주축인 학생단의 모임 장소였다.

학생 모임을 주도한 것은 승동교회에 다니던 김원벽이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교회 소학교 사무실에서 학생회 모임을 열었다. 학생들은 승동교회에서 3·1운동의 구체적 실천 계획을 논의했으며,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3·1운동으로 김원벽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투옥되자, 당시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12인의 장서’를 과감히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이 압수 수색을 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93년 ‘3·1독립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교회 마당 한편에 3·1독립운동기념 터 표지석을 세웠다.

학생과 시민이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식 거행 ‘탑골공원’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는 탑골공원에는 3·1운동 벽화, 손병희 선생의 동상 등이 있어 당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사진/ 서울사랑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는 탑골공원은 독립운동 성지로서 격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2002년 삼일절에 성역화 작업을 거쳐 재개장했다.

3·1운동의 상징 ‘보신각 3 ·1운동 기념 터’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외친 군중은 보신각에서 일제에 항의하는 표시로 보신각종을 울렸다. 이후 보신각은 3·1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었다. 학생단 주도로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열린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갈래로 나뉜 시위대는 정오경 이곳에 모여 독립 연설회를 개최했다. 이후 4월 23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유관순 열사를 기리다 ‘유관순교실과 유관순기념관’

유관순기념관은 수의를 입은 열사 사진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열사가 남긴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중구문화관광

1919년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던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유관순교실과 유관순기념관이 있다. 이화박물관 안에 있는 유관순교실은 당시의 교실 모습을 재현했으며,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학생의 모습을 영상으로 상영한다.

유관순기념관은 수의를 입은 열사 사진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열사가 남긴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근처에는 열사의 동상과 열사가 빨래를 했다는 유관순 우물터가 있다.

아쉽게도 유관순기념관은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화박물관은 일요일, 월요일, 법정 공휴일을 제외하고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다.

가장 치열했던 거사 장소 ‘선은전 광장 3 ·1독립운동 기념 터’

탑골공원에서 종로로 나온 군중은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장곡천정(현 소공로)을 거쳐 남산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진했다. 그리고 선은전 광장(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이르렀을 때에는 3,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총독부를 향해 본정통(현 충무로)으로 들어서자 일제 헌병이 이를 제지했고, 시위대와 격돌해 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 1일 그날, 가장 치열했던 장소다.

독립선언서 인쇄 ‘보성사 표석’

조계사 후문 맞은편에 있는 수송공원에는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선언서’ 3만 5,000장을 인쇄한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 보성사 터가 있다. 사진/ 서울사랑

조계사 후문 맞은편에 있는 수송공원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선언서’ 3만 5,000장을 인쇄한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 보성사 터가 있다. 인쇄물 운반 중 일본 형사에게 발각될 뻔하기도 했으나 족보로 위장해 위기를 넘겼다.

또 3월 1일에는 지하 신문 ‘조선독립신문’ 1만 부도 발행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눈을 피해 계속 조선독립신문을 찍어서 배포했으나 결국 발각되어 폐간됐다. 보성사도 1919년 6월 28일 밤 일본인에 의해 불태워졌다. 현재 보성사 터에는 6.35m 높이의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라는 조형물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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