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기행, 소설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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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소설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2.11.0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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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와 절망을 이겨내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묘사해
서울문학기행의 다섯 번째 여행은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은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로 신촌을 주 무대로 한다. 사진/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다섯 번째 여행은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은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로 신촌을 주 무대로 한다. 사진/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다섯 번째 여행은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은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
「서울, 1964년 겨울」은 구청 병사계 직원인 ‘나’와 대학원생 ‘안’과 아내의 죽음을 대가로 돈을 받아든 ‘서른 대여섯 살짜리 사내’가 우연히 만나서 보내게 되는 하루저녁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하룻밤의 놀이를 통해 문명사회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권태와 절망을 이겨내고자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해설은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의 한이수 연구원이 진행했다. 한이수 연구원은 2014년부터 궁궐길리잡이로 활동하며 덕수궁에서 시민을 위한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있다. 사진/김효설 기자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해설은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의 한이수 연구원이 진행했다. 한이수 연구원은 2014년부터 궁궐길리잡이로 활동하며 덕수궁에서 시민을 위한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있다. 사진/김효설 기자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해설은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의 한이수 연구원이 진행했다. 한이수 연구원은 2014년부터 궁궐길리잡이로 활동하며 덕수궁에서 시민을 위한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저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공저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공저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거닐다」가 있다. 문학기행의 코스는 홍익문고, 창전근린공원, 미네르바 카페, 연대캠퍼스, 옛 신촌역으로 이어졌다.

신춘문예 당선작,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소설가 김승옥

김승옥은 1965년 졸업을 전후로 대표작인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승옥문학관
김승옥은 1965년 졸업을 전후로 대표작인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승옥문학관

김승옥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1945년 귀국하여 전남 순천에 거주하였고, 부친이 여순사건 직후 사망하며 어머니와 남동생들과 함께 성장했다. 김승옥은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52년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하여 게재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동시, 콩트 등 창작에 몰두하였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김승옥은 1965년 졸업을 전후로 대표작인 「무진기행」과 함께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무진기행」은 문학사적 의의가 높은 대표작으로 소설의 구성원리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달빛 0장」 등을 간헐적으로 발표했다. 1980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먼지의 방」 연재를 시작했으나, 광주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군부대의 진압 사실을 알고 연재를 자진 중단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절필하기 전까지 2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1999년 세종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부임했으나, 2003년 중풍으로 쓰러지며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2004년 「내가 만난 하나님」을 발표하고, 2022년 등단 60주년을 맞이했다.
김승옥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묘사하면서 전후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순천문학관에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김승옥관이 마련되기도 했다. 절필과 뇌졸중으로 오랜 시간 침묵했던 김승옥은 현재 건강이 많이 호전된 상태이며, 순천문학관 김승옥관에 마련된 집필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 「서울, 1964년 겨울」

「서울, 1964년 겨울」은 세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하룻밤의 놀이를 통하여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분리되어 사회의 한 기계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사진은 아내의 시체를 팔은 세브란스. 사진/김효설 기자
「서울, 1964년 겨울」은 세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하룻밤의 놀이를 통하여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분리되어 사회의 한 기계 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진은 아내의 시체를 팔았던 세브란스. 사진/김효설 기자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1965년 6월 「사상계」에 발표된 김승옥의 단편소설로 제1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미시적인 사물에 광적으로 탐닉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거대한 문명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꿈과 생명력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을 조망한 작품으로 이 후, 김승옥은 196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세 명의 등장인물이 벌이는 하룻밤의 놀이를 통하여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분리되어 사회의 한 기계부품처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삶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구청 병사계 직원인 ‘나’와 대학원생 ‘안’과 아내의 죽음을 대가로 돈을 받아든 ‘서른 대여섯 살짜리 사내’가 우연히 만나서 보내게 되는 하루저녁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문명사회나 도시의 거대한 질서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소외로부터 짙은 절망감이나 권태를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그들을 선술집에서 만났다. 아니 삭막한 서울의 풍경이 우리를 포장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는지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서른 댓 살의 사내와 25세의 대학원생 안씨, 역시 25세의 나는 자기소개가 끝나자 대화가 끊겼다. 염색한 군용잠바를 입은 사내가 내놓은 구운 참새를 집으며 나는 화젯거리를 찾았다. 너무 반가워서 참새에게 고맙다고 할 지경이었다.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오, 아직까진.” 안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답게 그게 말이 되냐는 핀잔 대신 그렇게 대답하고 친절하게 묻기까지 했다. “김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예.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고 대화는 또 끊겼다. 발이 시려왔다. 포장마차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돌아갈까를 생각할 때 안이 기특한 말을 걸어왔다.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준비한 대답을 하듯 의기양양해져서 서울에서의 처음 생활을 말했다. 버스를 타면 1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 여자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아니, 자주 여자들과 접촉을 할 수 있는 점이 좋아 하루 종일 버스를 갈아탄 경험을 이야기했다. 특히 여자의 호흡에 따라 오르내리는 아랫배의 꿈틀거림은 정말 신선했다고. 그래서 여자의 아랫배를 가장 사랑한다고.
그러자 안은 동감을 하고 꿈틀거림의 대표로 데모를 들었다. 그리고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임을 강조했지만 나는 모르겠다고 필요 이상의 깨끗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처음처럼 다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안을 골려주고 싶었다.
평화시장 앞의 가로등 중 동쪽으로 여덟번째 등은 불이 켜지지 않는다. 화신 백화점 육층의 창들 중 세 개의 창문에서만 불빛이 나온다. 그러자 안의 얼굴은 기쁨으로 변해 서대문 정거장에 사람이 몇 명, 그 중 노인이 몇 명, 그건 현재 시각으로…… 라고 했다. 우리는 그런 식의 무의미한 이야기 놀이에 빠졌다. 우리는 또 심심해졌다. 확실한 개인소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간 술집에는 큰 미자, 둘째 미자, 셋째 미자……. 들어온 순서대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안은 나의 말을 제지했다. 그건 김형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큰 미자와 하룻밤 잤는데 다음날 일수 돈으로 나에게 빤스를 하나 사 주었다. 그러자 안은 그건 김형 소유가 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더 신이 나서, 그 여자는 됫병들이 술병에 110원을 저금하고 있다, 라고 확실한 나만의 소유를 나열했다. 우리가 계산을 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말쑥한 차림을 한 그러나 가난해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셋은 거리를 배회했다. 힘없는 아저씨는 중국 집에 들어가더니 비싼 음식을 시키라고 했다. “돈을 써버리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의외로 그 말은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고개를 떨구며 아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내 아내는 죽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시체를 팔았습니다.”
서적 외판원인 그는 아내를 해부용으로 판 돈 4,000원을 이 저녁에 같이 써버리자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우리는 영화 속의 식민지 거리처럼 춥고 한산한 그러나 현란한 광고가 난무한 거리를 배회하다 택시를 탔다. 어디로 갈까? 우리는 마침 우리의 옆을 막 스쳐 간 소방차 한 대를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는 페인트 통을 깔고 앉아 불 구경을 했다. 시시했다. “이 화재는 내일 아침 신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조금 먼저 봤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개인의 소유가 못 됩니다.” “내 아냅니다.” 불쑥, 힘없는 아저씨는 불 속에서 아내를 봤다고 외쳐댔다. “골치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아내가 머리를 막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자 곧 비둘기 같은 허연 것이 불 속으로 날아들었다. 당신이 던졌소? 라는 순경의 말에 아저씨는 돈과 돌을 손수건에 싸서 던졌다고 말한다. “이젠 돈을 다 쓴 셈이군요. 우린 이제 약속대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혼자 있기 무섭다고 어린애처럼 징징댔다. 우스운 일은 다음에도 벌어졌다. 통금시간이 다 된 밤에 아저씨는 월부책 값을 받겠다며 문을 두드렸다. 사이사이에 여보, 여보, 아내를 불러가며 그는 울기도 했다. 한 방에서 자자는 아저씨를 혼자 밀어 넣고 우리 역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나는 안이 전해주는 아저씨의 죽음을 듣고 잠이 확 깼다. 안은 계속 그렇게 되리라 짐작을 했다고 중얼거렸고 나는 계속 그렇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고 중얼거렸다. 나가자는 안의 말에 황급히 바지를 찾았다. 방바닥에 개미가 기고 있었다. 나는 개미가 나를 향해 돌진하는 느낌에 발을 옮겨가며 바지를 줏어 꿰다시피 해야 했다. 우리는 서둘러 여관을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안이 내미는 손을 급히 잡았다. 우리 이제 헤어집시다. 서둘러 헤어졌다. 버스에 올라 손을 보니 안은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의 주 무대, 신촌에서 시작한 문학기행

홍익문고는 1958년 박인철씨가 현 위치에서 10 여 미터 떨어진 곳에 판짓집으로 책방을 지어 개업한 당시 신촌의 유일한 서점이었다. 사진/김효설 기자
홍익문고는 1958년 박인철씨가 현 위치에서 10 여 미터 떨어진 곳에 판짓집으로 책방을 지어 개업한 당시 신촌의 유일한 서점이었다. 사진/김효설 기자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의 문학기행은 홍익문고, 창전근린공원, 미네르바 카페, 연대캠퍼스, 옛 신촌역으로 이어졌다.

홍익문고는 1958년 한양대학교 공대를 다니며 리어카 행상으로 책장사를 하던 박인철씨가 현 위치에서 10 여 미터 떨어진 곳에 판짓집으로 책방을 지어 개업했다. 당시 신촌의 유일한 서점이었다. 2009년 박인철씨가 암으로 사망하자 대기업의 부장이던 그의 아들 박세진씨가 운영을 맡았다. 2012년 이 지역이 신촌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되고 관광 숙박지구로 개발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에 박세진씨와 2천여 명의 ‘홍익문고를 지키는 주민모임’의 노력으로 홍익문고는 재기할 수 있었다. 그 후, 홍익문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책 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모임’을 만들어 서점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홍익문고는 건물의 5층을 개방하여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행사를 열며 지역사회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있다.

창전근린공원은 창전시민 아파트가 있었던 자리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한 후,  시민아파트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선 것이다. 창전근린공원에서 바라본 신촌 풍경. 사진/김효설 기자
창전근린공원은 창전시민 아파트가 있었던 자리다.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한 후, 시민아파트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선 것이다. 창전근린공원에서 바라본 신촌 풍경. 사진/김효설 기자

창전근린공원은 창전시민 아파트가 있었던 자리다.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20분 아파트 한 동이 폭삭 내려 앉아 32명이 숨지고 38명이 부상을 당하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안전기준에 미달된 시민아파트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선 것이다.

1960년대 서울인구는 240만명을 넘어서더니, 70년대에 들어서면서 540만명이 넘었다. 10년 사이에 300만명이 늘어나니 주택정책은 서울시의 가장 어려운 정책이었다. 1966년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김 현옥 시장은 부임 첫해에 도로, 육교, 지하도 건설에 이어 1967년 세운상가 착공, 1968년에는 한강개발과 지금의 여의도 기반공사인 윤중제 토목공사, 1969년에는 시민아파트 건설에 나섰다. 김현옥 전 시장은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재원을 확보하여 1973년까지 240억원을 들여 아파트 2천동을 지어 10만 가구에게 공급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시민 아파트’라는 것으로 시민들은 20만원만 내면 입주할 수 있는 파격적인 계획이었으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김현옥 전 시장은 물러나게 되었다.

경남 진주 출신의 김현옥 전시장은 사환신분으로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군에서 장교로 지원해 6.25때 공적을 세우더니, 516 이후에 군복을 입은 채 최연소 나이로 제12대 부산시장이 되었다. 부산시장 시절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시장으로 발탁된 김현옥 전시장의 문학계와의 인연은 부산시장 시절 그의 공보 비서관이 시인 천상병이였다. 느긋한 천상병 시인이 성격이 급한 김현옥 전시장과 어떤 업무 조합을 이뤘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미네르바 카페는 1975년 오픈해 올해로 47년째 한자리에서 원두커피를 고집하고 있는 신촌 최초의 원두커피전문점이다. 사진/김효설 기자
미네르바 카페는 1975년 오픈해 올해로 47년째 한자리에서 원두커피를 고집하고 있는 신촌 최초의 원두커피전문점이다. 사진/김효설 기자

미네르바 카페는 1975년 오픈해 올해로 47년째 한자리에서 원두커피를 고집하고 있는 신촌 최초의 원두커피전문점이다. 미네르바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하다. 오래된 커피전문점답게 천장은 커피색아고, 테이블도 예전 다방에서 보던 것 그대로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네르바의 자랑은 사이폰 방식으로 끓여내는 커피다. 사이폰 방식은 알코올램프 같은 기기를 이용하여 커피를 내리는 방식으로 커피향을 모두 잡아 놓기 때문에 풍미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 연세대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는 작품 ‘쏘가리’에서 미네르바에 대해 “그곳은 클래식 음악보다는 커피향이 더 인상적이고, 커피향보다는 더 인상적인 것이 커피를 끓이는 알코올램프이고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구석자리에서 눈을 감고 인상을 쓰고 있는 70년대식 낭만주의자들이다”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수경원은 조선 21대왕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원묘이다. 현재까지 이곳에는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과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사진/김효설 기자
연세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수경원은 조선 21대왕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원묘이다. 현재까지 이곳에는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과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사진/김효설 기자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연세대학교 캠퍼스. 이곳에서 수경원과 이한열 동산을 둘러봤다. 수경원은 조선 21대왕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원묘이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두었는데, 1남이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이다.1764년 69세의 나이로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는 의열묘가 되었다. 광무3년(1899년) 시도세자의 4대손인 고종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영빈 이씨의 묘를 수경원으로 승격하였다. 수경원은 1970년 서오릉 경내로 이전하고 연세대는 이 자리에 루스채플을 세웠다. 무덤속에서 3개의 석함과 두 벌의 지석, 한 벌의 명기가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이곳에는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과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이한열 동산은 수경원 위쪽에 조성되어 있다. 1987년 신촌을 들끓게 한 사건은 이한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최루탄이 시위하는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하고 터졌다. 이한열이 쓰러졌다. 교정의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켰다. 피격 27일째인 7월 5일 오전 2시 5분, 결국 이한열은 22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다. 사진/김효설 기자
1987년 신촌을 들끓게 한 사건은 이한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최루탄이 시위하는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하고 터졌다. 이한열이 쓰러졌다. 교정의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켰다. 피격 27일째인 7월 5일 오전 2시 5분, 결국 이한열은 22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다. 사진/김효설 기자

이한열 동산은 수경원 위쪽에 조성되어 있다. 1960년대는 현대사에서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 시기이다. 4.19를 비롯하여 그 이듬해의 5.16과 한일협정 등 주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에는 대학생 중심의 데모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신촌이 있었다. 1987년 신촌을 들끓게 한 사건은 이한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87년 6월 9일 오후 2시 1천여 명의 학생들이 ‘구속학우 환영 및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도서관 앞 민주관장에 모였다. 교문 밖으로 진출하기 위해 연대 교정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공중에서 발사되어야 할 최루탄이 학생을 향하여 발사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최루탄이 시위하는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하고 터졌다. 이한열이 쓰러졌다. 교정의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켰다. 학교에서는 전문의 12명으로 구성된 ‘이한열 군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피격 27일째인 7월 5일 오전 2시 5분, 결국 이한열은 22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다. 백 만명이 넘는 추도 인파는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연결되었고 이한열은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연세대 교정에서 교문을 향하는 방향에서 정문 안 50센티~1미터 떨어진 곳에 그의 죽음을 기억하자는 기념 동판이 서있다.  

신촌역사는 옛 서울역 건물보다 5년이나 앞선 1921년에 세워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유명하다. 2006년 기존의 역사 뒤에 민자역사 신축으로 역무실 부분을 철거하고 반대편으로 이설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진/김효설 기자
신촌역사는 옛 서울역 건물보다 5년이나 앞선 1921년에 세워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유명하다. 2006년 기존의 역사 뒤에 민자역사 신축으로 역무실 부분을 철거하고 반대편으로 이설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진/김효설 기자

연세대 캠퍼스를 나와 옛 신촌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촌역사는 옛 서울역 건물보다 5년이나 앞선 1921년에 세워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로 유명하다. 등록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된 이곳은 2006년 기존의 역사 뒤에 민자역사 신축으로 역무실 부분을 철거하고 반대편으로 이설하여 보존하고 있다.

신촌 지역의 형성과 발달은 1917년 연세대학교 개교와 더불어 1920년 경의선 신촌역 개통을 그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신촌역 노선은 신설되자마자 승객을 모으며 사실상 경의선의 본선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신촌역과 서강대역 사이에 신촌 연결선이라 불리는 짧은 반원형의 선로를 부설했다.

이로써 용산역-서울역-신촌역-서강대역-공덕역-효창공원역-용산역으로 이어지는 순환 선로가 구성되었고, 이 선로 위로 경성순환 열차가 운행되었다. 이는 경성 서부 교외 지역의 교통편의를 증가시켰으며, 특히,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의 통학 용도로 애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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