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기행] 일제강점기의 모더니스트, 이상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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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일제강점기의 모더니스트, 이상의 ‘날개’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0.10.14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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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에서 시청, 종로, 광화문, 통인동 ‘이상의 집’까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 '이상의 집'. 사진/ 김효설 기자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 '이상의 집'.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여섯 번째 문학기행이 ‘이상의 날개’를 주제로 진행됐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이상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소설 <날개>에서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한 번만 더 날아 보자 꾸나”라던 신세계백화점(옛 미쓰꼬시 백화점)부터 명동 거리, 옛 동방살롱, 시청, 그랑서울(옛 제비다방), 광화문, 이상의 집을 둘러보면서 그의 문학세계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상의 ‘날개’를 주제로 진행된 이번 문학기행의 해설자로 나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 사진/ 김효설 기자
이상의 ‘날개’를 주제로 진행된 이번 문학기행의 해설자로 나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 사진/ 김효설 기자

이상의 ‘날개’를 주제로 진행된 이번 문학기행은 회현역에서 시작했다. 해설자로 나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는 “회현역 근처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모여서 살던 ‘남촌’이라는 지역으로 조선의 서민들이 살던 북촌과는 달리 미쓰꼬시 백화점(신세계 백화점), 경성중앙우편국(중앙우체국), 조선은행(한국은행) 등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부촌’이었다.”고 한다. “미쓰꼬시 백화점은 날개의 주인공 ‘나’가 백화점 옥상에서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본 곳으로 “다시 한번 날아 보자”고 외친 곳은 옥상이 아닌 옥상에서 내려와서 다시 길을 “나서서”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디로 가야 할 지를 고심하던 거리”라고 한다.

미쓰꼬시 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은 날개의 주인공 ‘나’가 백화점 옥상에서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본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미쓰꼬시 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은 날개의 주인공 ‘나’가 백화점 옥상에서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본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신세계 백화점을 뒤로하고 중앙우체국으로 갔다. 1884년 11월 18일 설치한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 관청인 우정총국(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현재의 체신기념관 건물)이 서울중앙우체국의 시초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의 업무가 중단되었다가 1895년 지금의 종로구 세종로에 한성우체사가 설치되어 업무를 재개하였다. 1905년 7월 1일 경성우편국으로 명칭이 바뀌며 중구 소공로 70(충무로1가 21-1)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1939년 10월 1일 경성중앙우편국으로, 1949년 8월 13일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서울중앙우체국은 2003년 9월 2일, 건립된 지 32년이 되어 낡고 협소해진 옛 건물을 철거하고 2007년 9월 21일, 알파벳 ‘M’자 형태의 독창적인 외관을 지닌 새 건물을 준공하였다. 지하 7층, 지상 21층 규모로 건물 이름은 ‘포스트타워(POST TOWER)’이다.

중앙우체국에서 명동까지의 길은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인 소설 나목에서 한국전쟁 중 서울 명동의 미군 PX(현재 신세계백화점) 초상부에 근무하는 주인공 이경이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 옥희도(실존 화가 박수근)와 퇴근하면서 걷던 길이라고 한다. 사진/ 김효설 기자
중앙우체국에서 명동까지의 길은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인 소설〈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이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 옥희도(실존 화가 박수근)와 퇴근하면서 걷던 길이라고 한다. 사진/ 김효설 기자

중앙우체국에서 명동까지의 길은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인 소설 <나목>에서 한국전쟁 중 서울 명동의 미군 PX(현재 신세계백화점) 초상부에 근무하는 주인공 이경이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 옥희도(실존 화가 박수근)와 퇴근하면서 걷던 길이라고 한다. <나목>은 6·25 전쟁이 끝나지 않은 혼란기의 서울을 배경으로 화가 옥희도의 삶과 ‘나’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의 메인도로 중앙에 자리 잡은 ‘명동예술극장’은 일제 강점기에는 ‘명치좌’로 불리던 곳으로 1934년 일본이 영화전용관으로 건립한 바로크양식의 건물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의 메인도로 중앙에 자리 잡은 ‘명동예술극장’은 일제 강점기에는 ‘명치좌’로 불리던 곳으로 1934년 일본이 영화전용관으로 건립한 바로크양식의 건물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의 메인도로 중앙에 자리 잡은 ‘명동예술극장’은 일제 강점기에는 ‘명치좌’로 불리던 곳으로 1934년 일본이 영화전용관으로 건립한 바로크양식의 건물이다. '명동 국립극장'이란 이름으로 1973년까지 영화관, 공연장, 예술극장 등 한국문화예술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1975년 한 투자금융사의 사옥으로 사라졌지만 3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2009년 6월 5일 새롭게 문을 열었다. 새롭게 문을 연 명동예술극장은 외부 벽면은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냈지만, 내부는 전면 리모델링하여 최신 무대 시설을 갖춘 588석 규모의 중극장으로 탄생했다.

당시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지은 3층 건물로 동방문화회관이라 불린 이 건물은 3층은 회의실, 2층은 문인들의 집필실, 1층은 문화인 살롱(동방살롱)으로 사용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당시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지은 3층 건물로 동방문화회관이라 불린 이 건물은 3층은 회의실, 2층은 문인들의 집필실, 1층은 문화인 살롱(동방살롱)으로 사용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명동예술극장에서 을지로 입구까지 연결되는 거리는 곰탕집으로 1939년부터 영업을 해왔다는 하동관이 있는 곳으로 ‘이상의 거리’라 불리던 곳이다. 예전에는 이상과 박인환의 얼굴을 그린 동판이 바닥에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없다. 이 거리에 옛 동방살롱 건물이 있다. 현재 북촌손만두가 들어서 있는 이 건물은 당시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지은 3층 건물로 동방문화회관이라 불렸다. 3층은 회의실, 2층은 문인들의 집필실, 1층은 문화인 살롱(동방살롱)으로 박인환, 김기림, 김수영, 박태원 등 문인들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연극, 미술 분야의 문화예술인들로 항상 활기에 넘쳤으며 3층 회의실은 각종 모임이나 출판기념회, 파티 등이 열리곤 했다.

옛 경성부청인 서울시청 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 청사로 지은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지상 4층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옛 경성부청인 서울시청 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지은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지상 4층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명동을 나와서 옛 경성부청인 ‘시청’으로 향했다. 서울시청 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 청사로 지은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지상 4층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광복 이후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하는 동안 여러 차례 증·개축을 하면서 건물 외관에 다소 변형이 생겼지만, 건물의 주요 부분은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당시의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과거 일제 강점기의 경성부 청사인 데다가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일본을 가리키는 한자 ‘本’을 닮았다 하여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뜻으로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하지만 2003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게 되었다.
철거 문제로 화제가 됐던 태평홀은 자리를 옮겨 원형을 그대로 만드는 이전 복원을 하고 본관동은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한편, 안전에 이상이 없는 곳은 현 상태로 보존하여, 2011년 건립된 신청사와 함께 정보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상이 금홍과 서울로 돌아와서 문을 연 옛 제비다방(그랑서울)으로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 사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이상이 금홍과 서울로 돌아와서 문을 연 옛 제비다방(그랑서울)으로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 사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종각역은 민족자본으로 지어진 화신백화점(현 국세청 건물)이 있는 종로 네거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에게는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이상이 금홍과 서울로 돌아와서 문을 연 옛 제비다방(그랑서울)으로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 사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80년이 넘는 오랜 전통의 청진옥은 조선 후기 조시(아침에 문을 여는 시장)의 국밥집 솥에서 끓인 국이 해방 이후 대중식 해장국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서울 도심에 생겨난 나이트클럽에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춤을 추던 사람들이 통금이 풀릴 때까지 이곳에서 밥과 술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970년대 10여 개의 해장국집이 청진동에 들어서고 번성하면서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청진옥은 토렴식 국밥으로 유명한데 몇 차례 이전을 한 후, 지금의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다.

옛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광화문.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주관하던 총독부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옛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광화문.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주관하던 총독부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종로를 지나 옛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광화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주관하던 총독부는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로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자형 평면에 지층과 지상 4층을 올린 건물로 식민지 지배기구로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1926년 1월, 총독부 청사의 준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청사 앞에는 광장이 조성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미군이 재조선 미육군사령부군정청의 청사로 사용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캐피탈 홀’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를 번역해 ‘중앙청’이라 불렸다.

1948년 5월 10일 청사 중앙홀에서 제헌국회를 개의하였고, 1948년 8월 15일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1962년 11월 22일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본청 개청식을 열었고, 정부서울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정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1968년 서양식 정문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옛 자리에 복원하였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청사 중앙 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1993년 10월 15일 철거하였고 ‘청와대 구 본관 터’ 기념 표석을 세웠다.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선 마을이라 ‘서촌’으로 불리는 이곳이 한옥 보전지구가 되면서 골목길을 따라서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선 마을이라 ‘서촌’으로 불리는 이곳이 한옥 보전지구가 되면서 골목길을 따라서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광화문을 나와 경복궁역으로 갔다.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선 마을이라 ‘서촌’으로 불리는 이곳이 한옥 보전지구가 되면서 골목길을 따라서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국내외 관광객들로 혼잡할 정도였으나, 코로나19의 여파로 한산했다. 서촌은 조선 시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이상을 비롯해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 등의 예술가들이 서촌 주민이었다.

경복궁역에서 세종문화마을 음식거리를 지나 통인동 방향으로 가다가 우리은행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내 통인동 154번지에 자리한 ‘이상의 집’이 나타난다. 이상이 3~24세까지 살았던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으로 145평의 집이 5개의 필지로 나뉘어 도시형 한옥으로 새로 지어졌다. 이곳 역시 코로나19 방역으로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들여 다 보니, 이상의 시집과 소설 문학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이상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1930년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로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천재’와 ‘광인’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 이상은 26년 7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으나,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 <지주회시>, <봉별기> 등의 소설을 통해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으로 1910년 9월 23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1912년부터 통인동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20년 넘게 생활했다. 1917년 신명학교에서 공부하고 1921년 보성고보에 입학해 5학년 졸업했다. 1926년 경성고등 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쳐 1929년에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서 기수로 근무했다.

이상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1930년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로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 유튜브 갈무리
이상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1930년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로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 유튜브 갈무리

이상은 1930년에 처녀작인 「12월 12일」을 『조선』에 연재하면서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이다가 1931년 22세에 <이상한 가역반응>이라는 시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파편의 경치>와 1932년 단편 소설 <지도의 암실>을 통해 문학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 문학 작품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상'이라는 필명 대신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다. 그러다 같은 해인 1932년 <건축무한육면각체> 시를 발표하면서 '이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3년 24세에 심한 각혈로 그가 다니던 총독부 기수 직을 그만두고, 요양차 간 황해도 백천온천에서 기생 금홍을 만나 서울로 돌아온다. 그 후,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고 많은 문인과 교유하면서 7월부터 <이런 시>, <꽃나무>, <1933. 6. 1> 등 국문으로 시를 발표한다. 신명학교(당시 누상동 소재) 시절부터 미술 활동에 관심을 보여왔던 그는 1934년에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같은 해에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10회 연재 후 중단되었다.

통인동 154번지에 자리한 ‘이상의 집’은 이상이 3~24세까지 살았던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통인동 154번지에 자리한 ‘이상의 집’은 이상이 3~24세까지 살았던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동인지 <시와 소설>의 창간호 편집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구인회 활동과 더불어 소설<날개>을 발표하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35년 26세에는 시<지비>, <정식>, 수필<신촌여정>을 발표했으나 계속된 사업 실패를 겪다가 1936년 27세에 단편 <지주회시>, <날개> 등을 발표하고 변동림과 결혼 후, 10월에 재기를 위해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공포의 기록>, <종생기>, <권태>, <슬픈 이야기> 등을 쓰고 시<위독>, 수필<행복>, <추등잡필>, <19세기식>, 소설<봉별기>, <동해> 등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37년 2월 사상 불온 협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한 달여 뒤인 1937년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월에 유고작 '종생기'가 발표됐다. 같은 해 3월 말에 사망한 김유정과 함께 합동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6월 10일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가 '이상' 하면 떠오르는 대표 시가 있다. 바로 1934년 7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시 <오감도(烏瞰圖)>다. 이전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시로 계속 반복되는 단어와 신조어의 사용 등으로 이루어진 파격적인 시로 표면적으로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그 뜻과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난해한 시로 물의를 일으켜 독자의 비난을 받고 결국 8월 8일 중단되었다.

단편 소설 날개는 이상의 대표작으로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과 자아 분열을 그려 낸 최초의 심리 소설로 일컬어지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블로그
단편 소설 날개는 이상의 대표작으로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과 자아 분열을 그려 낸 최초의 심리 소설로 일컬어지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블로그

이후, 이상은 자신의 삶을 표현한 것 같은 단편 소설 <날개>를 1936년 9월 종합지인 <조광>에 발표한다. 이 작품은 이상의 대표작으로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과 자아 분열을 그려 낸 최초의 심리 소설로 일컬어지고 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는 일제강점기에 억압된 의식과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로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와 ‘아내’의 관계가 보통의 남녀 관계와는 다른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기생하고 있는 ‘나’의 유폐된 삶이 아내의 방과 ‘나’의 방이라는 공간적 분할과 차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나’의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나타낸다.

‘나’는 생의 의욕을 상실한 채 온종일 방 안에서 뒹굴며 지낸다. 아내의 외출을 틈타 밤이 되면 거리를 쏘다니고 경성역 티 룸에 앉아 차를 마신다. 아내가 외출할 때면 ‘나’는 아내의 방에서 놀곤 한다. 아내에게 내객이 찾아올 때면 아내는 ‘나’에게 은화를 준다. ‘나’는 은화를 벙어리 저금통에 모아 두다가 변소에 빠뜨린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는 내객과 함께 있었다. ‘나’는 이후에도 가끔 외출을 하다가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다. 아내는 ‘나’에게 아스피린을 주고 ‘나’는 그것을 먹고 잠만 자게 된다. ‘나’는 아내가 준 약이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고 외출하여 거리를 쏘다니다 미쓰코시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정오의 사이렌이 울리자 ‘나’의 의식이 깨어나는 듯하다. ‘나’는 날개가 돋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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