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여행지] ⑤근대기 서울여행,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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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여행지] ⑤근대기 서울여행,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임요희 기자
  • 승인 2018.03.21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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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광장, 상동교회, 한국은행앞광장, 해창양복점 등 서울미래유산과 함께하면 더욱 뜻깊어
1938년에 출간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구보씨가 하루 동안 서울 시내를 배회하며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한다. 사진/ 임요희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임요희 기자] 1938년에 출간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구보씨가 하루 동안 서울 시내를 배회하며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한다.

당시로선 상당히 낯선 형식의 소설이라 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의식의 흐름’에 ‘소설의 흐름’을 맡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소설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비교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소설 내용에도 ‘율리시즈’가 잠깐 등장하는데 박태원이 꾸민 의도적인 장치로 보인다.

율리시즈의 주인공 블룸이 1920년대의 더블린 시내를 배회했다면 1930년대의 구보씨는 서울 청계천, 종로, 남대문 일대를 배회한다.

근대화 물살을 타고 콘크리트 뚜껑에 덮여 긴 시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어야 했지만 2005년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통해 재탄생된 청계천. 사진/ 임요희 기자

어느 여름날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를 향해 걸어가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천변길이란 지금의 청계천으로 종로구와 중구 사이를 가르는 10.84km의 하천을 말한다.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600년 수도 서울의 숱한 이야기가 잠자고 있어 외국인 여행자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곳이다.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시대 수로사업을 통해 가옥의 침수를 막고, 도심을 깨끗하게 하는 생활하천의 역할을 했다. 한때는 근대화 물살을 타고 콘크리트 뚜껑에 덮여 긴 시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어야 했지만 2005년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통해 재탄생됐다.

청계천 일대는 주말마다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려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한편 점심시간에는 직장인의 가벼운 산책코스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청계천 일대는 600년 수도 서울의 숱한 이야기가 잠자고 있어 외국인 여행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진/ 서울시

청계천에는 95년 만에 복원된 광통교 등 총 22개의 교각이 을지로 구역과 종로 구역을 연결한다. 구보씨가 말하는 천변길 광교는 바로 이 광통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삼일교는 기미년 3월 2일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삼일로 인근 교각이며, 수표교는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세운 수표석(水標石)으로 세웠던 다리이다. 수표교의 원형은 1959년 청계천을 시멘트로 덮으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새벽다리는 시장 천막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와 향수를 연출하고 있고, 오간수교는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구보씨가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해 찾아간 화신상회는 현 종로타워 자리에 있던 백화점이다. 사진/ 임요희 기자

청계천변을 따라 걷던 구보씨는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해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보씨가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해 찾아간 화신상회는 현 종로타워 자리에 있던 백화점으로 1931년 친일 기업인이 박흥식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당시로선 첨단이라 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있었으며, 옥상에는 전광뉴스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복 이후에도 계속 영업을 이어왔으나 1987년 영업을 종료하고 철거되었다.

20세기 최고의 빌딩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인상적인 외관의 종로타워. 사진/ 임요희 기자

20세기 최고의 빌딩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인상적인 외관의 종로타워는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건축물이기도 해서 일본 만화가 키무라 아스카는 ‘로봇으로 변신할 듯한 건물’이라고 표현했다.

종로타워는 해외 영화와 드라마에 심심치 않게 출연하는데 ‘심시티5’ ‘스타크래프트 II: 자유의 날개’ ‘이터널시티’ ‘헬로 스트레인저’ ‘크리미널 마인드: 국경을 넘어서의 시즌2’에 등장한 바 있다.

1층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고 33층에는 서울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레스토랑 ‘탑클라우드’가 있다.

박태원이 멋없이 넓고 또 쓸쓸한 길로 표현한 광화문통. 지금은 서울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꼽힌다. 사진/ 임요희 기자

화신백화점을 나와 전차에 오른 구보씨. 전차는 “동대문을 돌아 경성운동장 앞으로” 달리고 구보씨는 목적지를 고민한다.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혹은 성북동으로...” 갈 생각을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는다.

“요사이 구보는 교외를 즐기지 않는다. 그곳에는 하여튼 자연이 있었고 한적이 있었다. 그리고 고독조차 그곳에는, 준비되어 있었다. 요사이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청량리, 성북동은 그렇다 치고 장충단마저 교외로 분류되던 시절이었다. 교통의 발달로 동해안 강릉까지 수도권이 되어버린 현시대 눈으로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손을 내밀면 길가에 서 있는 꽃도 딸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굴러가던 근대기 전차를 상상하는 일.

일제 수탈의 도구였던 조선은행은 일본의 명망 있는 건축가인 다츠노 긴고가 설계했다. 사진/ 임요희 기자

그가 긴(?) 전차여행을 마치고 하차한 곳은 조선은행 앞. 지금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다. 일제 수탈의 도구였던 조선은행은 일본의 명망 있는 건축가인 다츠노 긴고가 설계했다.

조선은행 앞 사거리는 당대 모던뽀이의 거리였던 명동의 진입로이자 미쓰코시 백화점(신세계백화점), 경성우편국, 남대문시장, 항일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본산지 상동교회, 양복점 거리 소공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장곡천정 진입로에는 조선호텔이 있었다. 웨스틴조선호텔로 명칭이 바뀌어 여전히 영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사진/ 임요희 기자

“조선은행 앞에서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보는 “아이에게 한잔의 가배차와 담배를 청하고 구석진 등탁자로 갔다... 구보는 자기에게 양행비가 있으면, 적어도 지금 자기는 거의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양행비란 해외여행에 소요되는 여행경비를 말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유럽여행, 미국여행은 누구나 꿈꾸지만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사치스러운 취미였다. 더욱이 가난한 소설가인 구보씨에게 양행비란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

런던에 ‘세빌로가’가 있다면 서울에는 소공동이 있다. 사진은 서울미래유산 해창양복점. 사진/ 임요희 기자

가난한 구보씨는 장곡천정(소공동) 카페에서 가배차(커피) 한 잔으로 만족한다. 런던에 ‘세빌로가’가 있다면 서울에는 소공동이 있다.

소공동은 맞춤양복점 거리로 한때 정계, 재계 실력자를 단골로 두었을 만큼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다. 지금은 기성양복에 밀려 해창양복점, 프라자양복점, 체스터필드 등 몇 집만이 남아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소공동이라는 명칭은 생각보다 오래 전에 생겼다. 조선 태종이 둘째딸 경정공주를 시집보내면서 남산 아랫동네에 큰 집을 지어주었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작은공주골이라 부른 데 기인한다.

일제시대 총독부 고위 관리들이 주로 살던 데가 필동이다. 이들은 조선은행 샛길인 작은공주길로 출퇴근 했다. 소공로에 즐비한 양복점들은 바로 이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구보씨 이동 경로에 속한 서울미래유산의 하나인 남대문시장. 사진/ 임요희 기자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구보는 남대문을 안으로 밖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구보씨가 경성역, 지금의 서울역에서 발견한 것은 졸부들의 허세이다. 사진/ 서울시

‘도회의 소설가’가 ‘도회의 항구’ 경성역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역에서 발견한 것은 졸부들의 허세이다. 구보씨는 글쟁이조차 금광 브로커 대열에 끼는 세태를 한탄하면서 중학 시대의 열등생, 전당포집 둘째 아들이 예쁜 여자를 끼고 월미도 여행에 나선 모습에 한숨을 토해낸다.

“그러한 여자가 왜 그자를 사랑하려 드나. 또는 그자의 사랑을 용납하는 것인가 하고. 그런 것을 괴이하게 여겨본다. 그것은 역시 황금 까닭일 게다. 여자들은 그렇게도 쉽사리 황금에서 행복을 찾는다. 구보는 그러한 여자를 가엾이, 또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 사내의 재력을 탐내본다.”

구보씨의 중편소설 분량에 이르는 이 긴 여정은 서울 시내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우리를 또 다른 여정으로 안내한다. 사진/ 임요희 기자

3포세대로 불리는 지금 청년이나 당대 룸펜이던 구보씨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앞에 사랑의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돈만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게 또 사랑이기도 하다.

“가엾은 벗이 있었다. 그 벗은, 결코 아름답지도 총명하지도 않은 한 여성을 사랑하고, 여자는 또 남자를 오직 하나의 사내라 알았을 때, 비극은 비롯한다.”

구보씨의 말처럼 대등한 감정의 교환을 통해 한 쌍의 연인으로 탄생하기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한 듯하다. 스스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그런 자격을 갖춘 상대를 고르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항일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본산지였던 상동교회. 한때 새로나백화점이 세들어 있었다. 사진/ 임요희 기자

“낮에 거리에 나와 일곱 시간을” 보낸 구보씨는 “광화문통 그 멋없이 넓고 또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걸어가며, 문득, 자기는, 혹은, 위선자나 아니었었나 하고” 성찰한다.

밤은 깊어가고 “조선호텔 앞을 지나, 밤늦은 거리를” 걷던 구보는 “맞은편 경성우편국 삼층 건물을” 일별하고 카페 등지를 배회 하다가 오전 두 시, 종로 네거리에 이르러 하루를 마무리한다.

단 하루지만 박태원 혹은 구보씨의 중편소설 분량에 이르는 이 긴 여정은 서울 시내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우리를 또 다른 여정으로 안내한다.

조선은행 앞 사거리는 당대 모던뽀이의 거리였던 명동의 진입로이자 미쓰코시 백화점의 입구였다. 지금은 신세계백화점이 된 미쓰코시. 사진/ 임요희 기자

특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따라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서울시미래유산’은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를 가진 명소를 따로 지정한 것으로 스토리텔링 여행으로 떠나기 좋다.

구보씨 이동 경로에 속한 서울미래유산으로 서울역광장, 남대문시장, 상동교회(구 새로나백화점), 한국은행앞광장, 해창양복점, 세종대왕동상, 이순신동상, 도로원표, 서울광장이 있다. 한편 신세계백화점은 소유주가 미래유산에 포함되기를 거부해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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