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학기행, 두 번째 탐방 '심훈의 그 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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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학기행, 두 번째 탐방 '심훈의 그 날이 오면'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0.07.2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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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난 동작구 흑석동 주변 역사 여행지를 찾아서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던 심훈의 여정을 찾아가는 서울 문학기행이 지난 7월 18일 진행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던 심훈의 여정을 찾아가는 서울 문학기행이 지난 7월 18일 진행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던 심훈의 여정을 찾아가는 서울 문학기행이 지난 7월 18일 진행됐다. ‘정지용의 녹번리’에 이어서 두 번째 진행된 두 번째 문학기행은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주제로 안양대 국문과 맹문재 교수가 해설자로 나와 심훈의 연보에 따른 설명과 함께 사육신묘 공원, 용양봉저정, 학도 의용병 현충비, 심훈 공원, 효사정, 심훈 생가 터(흑석동 성당)를 탐방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코로나19로 20여 명만 참가한 단출한 서울 문학기행의 두 번째 탐방은 집결지인 노들역에서 시작됐다. 이곳에서 이날 해설자로 나온 안양대 국문과 맹문재 교수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맹문재 교수는 전국 노동자문학회 매체인 ‘삶글’을 비롯해 ‘시작’, ‘삶과 문학’, ‘푸른 사상’ 등의 창간 및 주간을 맡았으며, 전태일 문학상, 윤상원 문학상, 고산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한  ‘사육신묘 공원’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류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한 ‘사육신묘 공원’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류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노들역을 나와서 한여름 더위를 피해 찾아간 곳은 ‘사육신묘 공원’. 동작구 노량진동에 자리한이곳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팽년, 성삼문, 류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와 김문기 등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1681년 숙종이 사육신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서 '민절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총 면적 4,940㎡에 33종 15,000주의 수목으로 조경된 사육신묘 공원에는 사당인 의절사, 홍살문, 삼문(불이문), 육각비, 신도비 등이 있다. 신도비 비각과 마주 보고 있는 육각형의 사육신 비는 1955년에 세워진 것이다. 코로나19로 사당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공원 광장에 모여 맹문재 교수의 해설을 들었다.

이날 해설자로 나온 맹문재 교수는 “심훈은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예술 세계를 펼친 분으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은 역사적 사회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실천적인 행동을 강조한 문학이었고, 언어 민족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이날 해설자로 나온 맹문재 교수는 “심훈은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예술 세계를 펼친 분으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은 역사적 사회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실천적인 행동을 강조한 문학이었고, 언어 민족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맹문재 교수는 심훈을 소개하면서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 돌집(현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대섭이고 필명은 심훈이다.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예술 세계를 펼친 분으로 다양한 호칭이 있지만, ‘심훈 선생’이라고 부르겠다”라며 “심훈 선생은 각 분야에 거친 다양한 활동과 짧은 문학 생애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게 자신의 의지와 사회적 욕구를 극대화한 작가이다. 식민지 현실, 훼손된 세계를 극복하고자 한 투철한 작가 의식으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구실로 한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실천적인 행동을 강조한 문학이었고, 언어 민족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심훈 선생의 작가 의식은 일관되어 그의 장편소설에 표출되는데, 심훈 소설의 정점이며 1930년대 이광수의 《흙》과 이기영의 《고향》과 함께 한국 농민소설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상록수》를 창작하게 된다.” 며 “특히,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 시대의 훼손된 현실에서 농민의 각성이 없이는 식민지 현실 극복이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고 지식인의 사회 구조적 위치를 의식하여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설명했다.

청년지식인의 삶의 의식을 작품화한 《상록수》는 남녀 지식인의 농촌운동을 중심으로, 농촌을 개발하고 계몽하려는 1930년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농촌계몽 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그 한계의 극복을 전망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진/ 김효설 기자
청년지식인의 삶의 의식을 작품화한 《상록수》는 남녀 지식인의 농촌운동을 중심으로, 농촌을 개발하고 계몽하려는 1930년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농촌계몽 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그 한계의 극복을 전망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진/ 김효설 기자

“청년지식인의 삶의 의식을 작품화한 《상록수》는 남녀 지식인의 농촌운동을 중심으로, 농촌을 개발하고 계몽하려는 1930년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농촌계몽 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그 한계의 극복을 전망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상록수》는 그 결말 처리에 있어서 현실의 냉엄함을 무시한 채 낭만적인 열정으로 낙관주의적 색채를 보인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염원을 형상화함으로써 어두운 시대의 독자들에게 희망과 이상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를 보인다”고 강조했다.

노들나루 공원에서 펼쳐진 연희프로젝트 ‘와라’의 공연은 관람했다. 기존의 사물놀이 형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노들나루 공원에서 펼쳐진 연희프로젝트 ‘와라’의 공연은 관람했다. 기존의 사물놀이 형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사육신묘 공원을 나와 효사정까지 갈 수 있는 역사 탐방길을 따라서 ‘노들나루 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4명의 연희자로 구성된 연희프로젝트 ‘와라’의 공연을 관람했다. 기존의 사물놀이 형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공연은 삼도의 농악 가락을 재창조한 ‘하’와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괜찮은 척”을 스토리텔링을 한 ‘척’에 이어 현대적인 타악기 퍼포먼스로 장단의 틀 안에서 자유롭게 연주한 ‘술’이 펼쳐졌다. 특히 관람객을 무대로 이끌어 함께 즐긴 ‘술’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와라의 공연을 뒤로하고 ‘용양봉저정’으로 갔다.

‘용양봉저정’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방문하는 화성행궁 시에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오가며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용양봉저정’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방문하는 화성행궁 시에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오가며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용양봉저정’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방문하는 화성행궁 시에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오가며 잠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노들나루에 도착한 정조는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는 동안 어가가 머물러 쉴 자리가 필요해 근처에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정자 이름을 "북쪽에 우뚝 선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고 봉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 기반을 의미하는 듯하다"라며 ‘용양봉저정’이라 지었다. 이 정자는 아직도 한강대교 앞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다음에 찾아간 곳은 효사정 길을 따라서 펼쳐진 학도의용병 현충비. 심훈 공원 입구에 있는 학도 의용병 현충 비는 한국전쟁 시 3사단에 참전한 학도병의 애국심을 기리고 고취하기 위해서 3사단 김석원 사단장이 세운 비로 당시 전쟁에 참여한 어린 71명의 학도병 중 48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심훈 공원에는 산책로를 따라서 심훈의 일대기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 공원에는 산책로를 따라서 심훈의 일대기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학도의용병 현충 비를 지나자 심훈 공원이 이어진다. 산책로를 따라서 펼쳐지는 심훈의 일대기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시인이며 소설가이자 감독, 기자이기도 했던 심훈은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박헌영을 동기생으로 만난다. 시대일보 박병순과 함께 박열, 박헌영은 훗날 그의 시 <박 군의 얼굴>의 주인공이 된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심훈은 1917년 18세에 일본인 수학 선생의 민족차별에 대한 항거로 백지 답안을 제출해 낙제, 유급을 당하고 20세에 3.1운동에 참여 8개월의 투옥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 후 1921년 중국 항주로 가서 지강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베이징에서 신채호, 이화영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감회를 받게 된다. 1923년에는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하고 1925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번안 소설 ‘미인의 한’ 번안과 탈춤을 연재하다가 1926년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식민지의 현실을 다룬 ‘먼동이 틀 때’를 집필한다. 그해 11월 22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그의 얼굴을 보고 ‘박 군의 얼굴’을 썼다.

심훈 공원을 지나면서 영화감독이자 배우로도 출연한 ‘장한몽’과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검열 본을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 공원을 지나면서 영화 '먼동이 틀 때'의 한 장면과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을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일본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1928년 29세에 조선일보에 입사, 1930년 31세에 시작품 ‘그날이 오면’을 집필하고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조선일보를 사직하고 ‘불사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이마저 중단되었다. 1932년 33세에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해 ‘필경사’라는 자택에서 상록수의 집필에 매진했다.

1935년 36세에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상록수》를 응모해 당선되었다. 《상록수》는 농촌계몽 운동을 펴다 요절한 최용신의 이야기를 연결해 완성한 작품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심훈은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상금 500원 중 100원을 기부해 도왔다. 1936년 37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에 감격해 오오, 조선의 남아여! 라는 시를 마지막 글로 남겼다. 심훈은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단행본 출간을 위해 상경해 한성 도서주식회사 2층에서 집필에 몰두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향년 36세로 타계했다. 이후 200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심훈 공원을 지나면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은 심훈의 좌상, ‘그날이 오면’ 시비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 공원을 지나면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은 심훈의 좌상, ‘그날이 오면’ 시비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 공원을 지나면서 영화감독이자 배우로도 출연한 ‘장한몽’과 일제의 게재 정지 처분으로 중단되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3위를 한 남승룡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오오, 조선의 남아여! 등에 대한 소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에 좋은 심훈의 좌상, ‘그날이 오면’ 시비 등을 볼 수 있다.

이어 도착한 ‘효사정’은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속공 노한의 별서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다. 옛 효사정은 사라졌고, 1993년 흑석동 한강 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한강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심훈의 둘째 아들(심원섭)에게 고증을 받아서 세운 생가터. 천주교 흑석동 성당의 입구에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심훈의 둘째 아들(심원섭)에게 고증을 받아서 세운 생가터. 천주교 흑석동 성당의 입구에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마지막으로는 심훈의 둘째 아들(심원섭)에게 고증을 받아서 세운 생가터를 찾았다. 천주교 흑석동 성당의 입구에 덩그러니 비석만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당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하였다.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영화 <먼동이 틀 때>, 시 <그날이 오면>, 소설 <상록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라고 쓰였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며 찾아간 이번 문학기행은 동작구 흑석동 일대의 역사 유적지와 심훈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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