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기행, “1930년대 청계천 변 서민들의 삶을 엿보다” 구보 박태원의 ‘천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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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1930년대 청계천 변 서민들의 삶을 엿보다” 구보 박태원의 ‘천변풍경’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0.08.07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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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후, 대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 1, 2, 3부' 집필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은 청계천 변에 사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린 ‘세태소설’로 1930년대 후반, 서울 청계천 주변에 살았던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한눈에 파악해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은 청계천 변에 사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린 ‘세태소설’로 1930년대 후반, 서울 청계천 주변에 살았던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한눈에 파악해볼 수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세 번째 탐방은 ‘구보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으로 작가가 태어난 무교동에서 작품의 배경인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야간 기행으로 진행됐다.

다양한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서울의 모습은 어떨까? 서울의 근·현대 모습과 서울 사람의 삶의 모습을 표현한 문학작품을 찾아서 떠나는 서울문학기행. ‘정지용의 녹번리’, ‘심훈의 그날이 오면’에 이어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세 번째 탐방의 주제였다.

야간 기행으로 열린 이번 탐방은 청계천 광통교, 우미관 터, 베를린 광장, 수표교, 세운광장 유적지, 광장시장, 청계천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까지 청계천 변을 따라가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야간 기행으로 열린 이번 탐방은 청계천 광통교, 우미관 터, 베를린 광장, 수표교, 세운광장 유적지, 광장시장, 청계천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까지 청계천 변을 따라가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사진/ 김효설 기자

지난 7월 25일 무더위를 피해서 야간 기행으로 열린 이번 탐방은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의 황미선, 신수경 연구원이 해설자로 나서 청계천 광통교, 우미관 터, 베를린 광장, 수표교, 세운광장 유적지, 광장시장, 청계천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까지 청계천 변을 따라가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이번 문학기행의 특징은 해설과 함께 스토리텔러의 공연이었다.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 해설자들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나와 역할극을 진행해 재미와 집중력을 더해주었다.

참가자들은 종각역 5번 출구로 나와 전봉준 동상 앞에서 집결해 황미선 연구원의 해설로 일정이 시작됐다. 황미선 해설자는 “월북해 실명과 반신불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한 <갑오농민전쟁 1, 2, 3부>를 통한 박태원의 문학 혼을 되새기기 위해서 전봉준 동상에서 이번 문학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시위대의 행진으로 무교동 ‘박태원 생가터(무교동 관광공사)’ 방문을 포기하고 소음을 피해서 광통교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 역시 시위대의 소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2019년에도 ‘박태원의 천변 풍경’을 진행한 경험이 있는 황미선, 신수경 연구원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쫄깃한 해설로 집중할 수 있었다.

이번 문학기행의 특징은 해설과 함께 스토리텔러의 공연이었다.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 해설자들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나와 역할극을 진행해 재미와 집중력을 더해주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이번 문학기행의 특징은 해설과 함께 스토리텔러의 공연이었다.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 해설자들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로 나와 역할극을 진행해 재미와 집중력을 더해주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구보 박태원은 1909년 경성부 다옥정(지금의 중구 다동)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6년 18세에 춘원 이광수에게 문학 수업을 받고 그해 3월 ‘조선문단’에 시 <누님>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29년 21세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22세에 동경 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해 ‘신생’ 10월호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당대 유럽을 풍미했던 모더니즘 사조와 신심리주의 문학과 영화, 미술, 음악 등 서양 예술 문화 전반에 심취했던 박태원은 돌연 동경 법정대학 예과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당시 박태원은 앞머리를 일직선으로 자른 ‘오갑빠 헤어스타일’과 ‘대모테 안경’, 목에는 ‘빨간 댕기(넥타이)를 메고, 단장을 한쪽 팔에 걸친 외모로 ‘모던 보이’라 불리며 장안에 이름을 날렸다.

'천변풍경'에서 구보 박태원은 섬세한 묘사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1930년대 서울, 청계천 변에서 일어나는 그 시대의 생활 모습을 다채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천변풍경'에서 구보 박태원은 섬세한 묘사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1930년대 서울, 청계천 변에서 일어나는 그 시대의 생활 모습을 다채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33년 25세에는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고, 1934년 26세에 ‘조선중앙일보’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연재한다. 1936년 28세에 종로 관철동으로 이사하고 ‘조광’에 <천변풍경>을 연재한다. 1938년 30세에 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출간한다.

1941년 33세에 ‘신시대’에 <신역 삼국지>를 발표하고 <수호지> 등을 출간하다가 1949년 41세에 <갑오농민전쟁>의 모태가 되는 <군상(조선일보)>, <임진왜란(서울신문)> 등 역사소설을 연재한다. 조선문학가동맹 집행위원이며, 보도연맹에 가입한 박태원은 1950년 42세에 6.25전쟁 인민군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9월 22일 ‘남조선문학가 동맹시찰단’일원으로 북쪽으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다.

박태원은 월북 후 평양문학대학교수, 국립고전예술극장 전속 작가로 활동하면서 소설 <심청전>, <삼국연의>에 이어 1964년 56세에 대하 역사소설 <계명 산천은 밝아오느냐>를 집필한다. 이 작품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감동을 하여 각종 표창과 생일상까지 치하하는 등 대단한 인정을 받았으며 김정일 위원장은 직접 손목시계도 보내주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황미선 해설자는 “월북해 실명과 반신불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한 '갑오농민전쟁 1, 2, 3부'를 통한 박태원의 문학 혼을 되새기기 위해서 전봉준 동상에서 이번 문학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박태원은 월북해 실명과 반신불수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 1, 2, 3부'를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한다. 사진은 종각역 5번 출구앞에 있는 전봉준 동상 사진/ 김효설 기자

1965년 57세에 <갑오농민전쟁>의 1부 <계명 산천은 밝아오느냐> 1권을 출간하고 실명하게 된다. 그후,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 불수가 되고 언어장애를 겪다가 부분적으로 회복해 1977년 69세에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 1부>를 출간한다. 1980년 72세에 <갑오농민전쟁 2부>를 출간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아내에게 구술하는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박태원은 1986년 78세로 평양시 중구역 대오문동에서 사망한다. 그해 12월 20일 유작으로 <갑오농민전쟁 3부>가 박태원·권영희 공저로 출간됐다.

박태원이 집필한 소설 <천변풍경>은 청계천 변에 사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린 ‘세태소설’로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1930년대 후반, 서울 청계천 주변에 살았던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한눈에 파악해볼 수 있다. 실제 박태원은 서울 토박이로 청계천 변 약국집의 아들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과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작품 속에 자연스레 표현했다.

박태원은 이상과 함께 모더니즘 문학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근대 대표 문인으로 모더니즘은 도시의 문학으로 한국 근대화 과정의 중심은 전통적 수도인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좌로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박태원은 이상과 함께 모더니즘 문학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근대 대표 문인으로 모더니즘은 도시의 문학으로 한국 근대화 과정의 중심은 전통적 수도인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좌로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박태원은 이상과 함께 모더니즘 문학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근대 대표 문인으로 모더니즘은 도시의 문학으로 한국 근대화 과정의 중심은 전통적 수도인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또한, 박태원은 영화 ‘기생충’으로 2019년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한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30년대 청계천 변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면서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천변 사람들은 이 변화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점차 근대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갔다. 구보 박태원이 1936년, 잡지 ‘조광’에 <천변풍경>을 연재할 즈음 청계천 변에는 빨래터, 한약국, 포목전 등 조선 시대 이래 전통적인 시설들과 이발소, 하숙집, 카페, 식당 등 근대적인 시설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구보 박태원은 섬세한 묘사와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1930년대 서울, 청계천 변에서 일어나는 그 시대의 생활 모습을 다채로운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관철동의 옛 ‘우미관’ 옛터. 우미관은 1912년에 세워진 조선인만을 위한 최초의 상설영화관으로 8 ·15광복 때까지 단성사·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일류 개봉 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사진/ 김효설 기자
관철동의 옛 ‘우미관’ 옛터. 우미관은 1912년에 세워진 조선인만을 위한 최초의 상설영화관으로 8 ·15광복 때까지 단성사·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일류 개봉 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사진/ 김효설 기자

현재 청계천에는 모전교를 포함해 22개의 다리가 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에는 광통교와 수표교 다리가 자주 등장한다. 광통교는 길이 12m, 폭 15m로 도성 안에서 가장 큰 다리로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 등 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에 있었다. 임금이 능행을 하거나 성 밖으로 행차를 하거나 중국의 사신들이 오고 갈 때도 광통교를 이용했다. 1900년 초 서울에 전차 노선이 건설되면서 광통교 동편에 전찻길이 놓이기 시작하면서 광통교가 훼손되기 시작했다. 본래보다 4분의 1가량으로 축소된 현재의 광통교는 2003년부터 시작된 청계천복원사업으로 복원되었다.

광통교를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관철동의 옛 ‘우미관’ 터. 우미관은 1912년에 세워진 조선인만을 위한 최초의 상설영화관으로 8 ·15광복 때까지 단성사·조선극장 등과 더불어 일류 개봉 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우미관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에게 쫓겨 가던 인민군이 불을 질러 종각에서 종로 4가까지 다 불에 타버리게 된다. 화재로 1959년 화신백화점 옆으로 자리를 옮긴 1960년대부터는 이류 재개봉 극장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2년 11월 말 문을 닫았다. 우미관 주변으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관, 카페, 바, 식당, 노점 등이 들어서면서 관철동은 경성 일본인 촌의 ‘혼 마치’와 같은 북촌의 대표적인 환락가로 발전했다.

2005년 9월 청계천 변에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베를린 광장에는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철거됐던 베를린장벽의 한 부분인 높이 3.5m, 폭 1.2m 크기의 장벽 3개가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2005년 9월 청계천 변에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베를린 광장에는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철거됐던 베를린장벽의 한 부분인 높이 3.5m, 폭 1.2m 크기의 장벽 3개가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우미관 터가 있는 관철동에서 나와 ‘베를린 광장’에 도착했다. 2005년 9월 청계천 변에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베를린 광장에는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철거됐던 베를린장벽의 한 부분인 높이 3.5m, 폭 1.2m 크기의 장벽 3개가 있다. 장벽은 서독과 동독 쪽으로 나뉘는데, 서독 쪽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서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을 염원하는 글과 그림 등이 새겨 있고, 동독 쪽은 장벽으로 접근을 막아서 깨끗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와 함께 베를린시를 상징하는 ‘곰’ 동상이 있다. 몸통의 왼편에는 남대문이 오른편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그려져 있다.

다시 청계천 변으로 걷다가 수표교에 도착했다. 수표교는 1420(세종 2)년에 축조되었는데, 당시 이곳에 소와 말을 매매하거나 대여해주는 말 시장이 있어 ‘마전교’라고 불렸다. 이후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 변에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순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열리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순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열리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지금 남아 있는 수표는 순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열리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또한 수표교는 임금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희전’으로 가는 통로로 설, 한식, 단오, 추석 등 명절이 되어 임금의 어가 행렬이 지날 때면 구경꾼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 수표교에서 장희빈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수표교와 수표는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다가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수표는 다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했다.

청계천 변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면서 도착한 곳은 ‘세운광장 유적지’. 조선 시대 세운상가가 있는 이곳은 중부 장통방에 속했다. 북쪽으로 조선왕조 최고의 국가 제사 시설인 종묘가 있고, 남쪽으로 한양 도성을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는 청계천이 흘렀다. 이 일대는 상업과 주거지가 섞인 인구 밀집 지역으로 종각부터 종묘까지 길 양쪽으로 시전이 이어지고 그 뒤로 민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불이 나면 주변으로 쉽게 옮겨붙어 화재의 피해가 잦았으며, 청계천도 자주 범람해 수해도 빈번했다.

세운상가 재생을 위해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추진해 초록띠공원 부지에는 경사광장 건립이 추진되고 2016년 공사에 앞서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를 확인하는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세운상가 재생을 위해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추진해 초록띠공원 부지에는 경사광장 건립이 추진되고 2016년 공사에 앞서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를 확인하는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일제강점기에 폭격에 대비해 민가를 강제로 헐고 소개 공지를 만들었다. 6·25전쟁 후 이 공터에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들어섰다. 1968년에 도심개발 사업으로 판자촌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가 들어섰다. 2008년 12월 서울시는 낡은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종묘와 남산 사이 녹지 축을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초록띠공원을 조성했으나, 주변 지역과 통합개발 문제가 불거지고 경기마저 침체해 계획은 무산됐다. 2015년 서울시는 세운상가 재생을 위해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추진해 초록띠공원 부지에는 경사광장 건립이 추진되고 2016년 공사에 앞서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를 확인하는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서울시는 발굴된 유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2009년에 철거된 현대 상가 기초를 재활용하여 새 건축물을 완공하고 공개 전시하고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서울시는 발굴된 유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2009년에 철거된 현대 상가 기초를 재활용하여 새 건축물을 완공하고 공개 전시하고 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조선 시대에 중부 관아로 기록되어 있던 이곳에서 민가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청동거울, 청동화로 등 제사용품들과 봉황문 막새기와 함께 ‘천’자 새김전돌 등이 출토됐다. 서울시는 발굴된 유적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2009년에 철거된 현대 상가 기초를 재활용하여 새 건축물을 완공하고 공개 전시하고 있다.

세운광장 유적지를 나와 골목길을 따라가니 ‘광장시장’이 보인다. 광장시장은 1904년 을사늑약 체결 후 경제 국권 회복을 위해 설립된 최초의 상설시장으로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 중 하나인 ‘이현시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05년 일제가 화폐 정리사업을 단행하면서 조선 상인의 기반을 흔들자 조선 상인들이 그해 7월에 예지동 4번지에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동대문시장’으로 불리다가 시장의 관리를 위해 ‘광장주식회사’ 설립되면서 ‘광장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장시장은 서울을 대표하는 한복 및 포목 전문 도매시장으로 오랜 역사와 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담긴 전통시장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광장시장은 서울을 대표하는 한복 및 포목 전문 도매시장으로 오랜 역사와 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담긴 전통시장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광장시장은 서울을 대표하는 한복 및 포목 전문 도매시장으로 오랜 역사와 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담긴 전통시장이다. 광장시장의 구제시장은 6.25 한국전쟁 때 시장의 일부가 파괴되었다가 피난민들이 생필품과 군수품을 거래하면서 활성화되어 한국 수입 구제시장의 시초가 되었다. 이외에도 침구 부, 여성 의류, 식료품부 등이 있으며, 마약 김밥, 빈대떡, 육회, 족발, 순대, 떡볶이 등 저렴하고 푸짐한 여러가지 먹거리로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어두워진 버들다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해 생을 마감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어두워진 버들다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해 생을 마감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 어두워진 다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해 생을 마감했다.

서울문학기행은 매회 각기 다른 주제를 정하여 서울의 문학 유적지 및 문학관, 작가의 집터, 문인들의 시비 등을 탐방하는 도보 기행 프로그램으로 약 3시간 소요된다. 서울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나, 코로나19로 매회 선착순 2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오디오가이드시스템, 어반티비 시청을 위해 개인 이어폰을 준비해야 한다. 네 번째 문학기행은 박경리의 불신시대로 정릉의 박경리 가옥과 경국사, 청수장 등을 탐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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