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부자들의 성지’였던 인사동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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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부자들의 성지’였던 인사동 가보니
  • 이혜진 기자
  • 승인 2019.06.0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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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논리에 퇴색된 정체성…영업 금지 업종 가게 즐비
지난 4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쌈지길을 찾았다. 쌈지길은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복합 쇼핑 공간이다. 인사동 거리는 단순한 소비와 관광만을 위한 곳으로 변해, 문화 정체성이 퇴색하고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이혜진 기자] 뉴욕 센트럴파크와 파리 샹젤리제, 베이징 톈안먼광장과 도쿄 신주쿠. 우리나라 여행객이 특히 많이 찾는 거리 명소들이다. 그렇다면 외국인 여행객이 찾아올 만한 국내의 거리 명소는 어딜까. 한국의 ‘문화지구 1호’ 서울 인사동은 그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4일 ‘인사동 문화지구(종로구 인사동‧낙원동‧관훈동‧견지동‧경운동‧공평동)’를 찾았다. 해당 지구는 동쪽으로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 종로와 맞붙어 있다. 지정 면적은 17만 5743㎢에 이른다.  

지난 4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을 찾았다. 거리 한복판에 붓을 형상화한 초대형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왼쪽엔 유명 음식점 프랜차이즈가 있다. 인사동 문화거리에서 체인점 형태로 운영되는 일반음식점 영업은 규제 대상이다. 사진/ 이혜진 기자

하지만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수십 년 명맥을 이어왔던 골동품 가게들은 대부분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떠난 상태였다.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턱없이 높였기 때문. 

반면 노래방과 커피 체인점들은 즐비했다. 경제 논리에 정체성이 퇴색된 것이다. 지난 2013년 지정된 ‘인사동 문화지구 관리계획 변경안’에 따르면, 해당 지역에서 이들 업종의 영업은 금지되어 있다. 

지난 4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한 찻집을 찾았다. 옛날 한옥집을 개조했다. 인사동에서 한국 전통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사진/ 이혜진 기자

인사동 문화지구는 전통문화 거리의 급격한 해체를 막기 위해 2002년 국내 최초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곳의 전통은 이미 1970년대부터 사라져갔다. 지난 1977년 동아일보는 “골동품상가로 유서 깊은 인사동거리가 올 들어 갑자기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며 “골동품가게 30여개가 늘어서 고풍의 정취를 자아내던 거리가 관광객을 위한 토산품 센터, 도자기 모조품, 신조품 가구점 등의 거리로 탈바꿈해 이젠 볼품없고 알맹이 없는 빈 거리가 되어가고 있다”고 보도한바 있다.   

권장 업종인 공예품 가게를 편법 운영하는 곳들도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기념품 가게를 전통 공예품 판매점처럼 운영하는 것이다. 

지난 4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문화거리를 찾았다. 문화거리 권장 업종인 공예품 가게 대신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기념품 가게를 전통 공예품 판매점처럼 운영하고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인사동 골동품 거리의 역사는 100여 년이 넘는다. 

이와 관련해 1970년 경향신문은 “당시(1910년대) 지금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 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며 “왜정 말기부터 해방직후까진 이곳에 4~5개소의 점포가 자리했는데 6·25 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4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문화거리를 찾았다. 문화거리 권장 업종인 표구 가게 앞에 작은 글씨로 '점포 정리'라고 써 있다. 과거 서화 가게들이 인사동에 들어서자 작품을 단장하는 표구사도 따라 들어왔지만, 이제 인사동에 표구 가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진/ 이혜진 기자

그러나 이후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해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어 인근 대학로와 마포구 홍대 권역도 문화지구로 지정되며 같은 길을 걸었다. 과거 뉴욕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뉴욕 맨해튼엔 살인적인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인근 공장지대인 브루클린으로 떠나려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그러자 뉴욕의 한 부동산 회사는 브루클린의 아파트형 공장을 매입, 예술가들에게 생활 및 작업 공간을 제공해 임대료를 받았다. 결국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가들의 도시로 알려지며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맨해튼 다리를 감상할 수 있는 브루클린 ‘덤보(Down Under the Manhattan Overpass)’ 지역은 이제 뉴욕을 상징하는 관광 명소가 됐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고층 빌딩을 찾았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은 과거 외환위기 당시 싱가포르의 한 부자가 인사동의 문화적 가치가 부동산에 반영될 것을 기대해 지어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20년이 넘은 지금 이곳의 부동산 가치는 당시보다 훨씬 뛰어올랐다. 또 다른 문화지구인 대학로와 홍대에도 이 같은 이유로 설립된 건물이 많다. 사진/ 이혜진 기자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 인위적인 문화거리 사업에 1억 달러(한화 약 1200억 원)를 투자했던 해당 부동산 회사는 투자한지 20년 만에 약 100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거리가 문화의 순수성을 유지하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문제는 정부가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지정한 문화지구의 정책적 명분이 이렇듯 불가능해 보이는 영속성을 추구하는데 있다.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에 더 큰 호재였다. 많은 관광객이 단순한 소비와 관광만을 위해 인사동에 모여들었고, 그러자 더욱 주목받는 상권이 됐기 때문. 이는 이곳의 전통 문화 보존보다 상업화를 가속화시켰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문화의 거리 한 가운데에 치즈 카스테라 가게를 안내하는 팻말이 있다. 이 일대엔 전통 식품보다 커피숍, 빵집, 터키 아이스크림 등을 판매하는 곳이 더 많다. 사진/ 이혜진 기자

대신 인사동의 상업화는 이 곳 특유의 문화를 지역 밖으로 확장시켰다. 인근에 위치한 삼청동이 그 예다. 하지만 해당 지역도 인사동의 전철을 밟으며 상가 임대료가 폭등했다. 그러자 임대료 부담을 견디지 못한 상인이 하나둘씩 떠나며 2016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는 삼청동 일대의 외식업계 가격 할인으로 이어져, 상인들은 2~3년 전보다 메뉴 가격을 10~20% 낮추거나 ‘1+1’ 서비스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인사동의 문화가 옮겨간 서촌도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문화지구 정책이 해당 지역과 그 주변 일대의 전통문화 사업 당사자보다 건물주에게 지원된 데서 발생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인사동 문화지구 관리 주체인 종로구의 단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종로구청 인사동 문화지구 담당자인 최상진 주무관은 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비 권장 업종에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이 마련된) 2013년 이전 들어선 점포는 단속이 어렵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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