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트라우마, 아우슈비츠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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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트라우마, 아우슈비츠를 가다
  • 임요희 기자
  • 승인 2016.06.24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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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에 방문하는 아픈 기억의 도시
유대인 수용소이자 학살의 장소였던 오시비엥침은 지금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되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아우슈비츠 박물관 페이스북

[트래블바이크뉴스=임요희 기자] 호국보훈의 달 6월도 장마와 함께 지나가고 있다. 6월은 가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전쟁의 참상이다. 한편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때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특히 전쟁 막바지인 1940~19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대인은 아우슈비츠에 끌려와 온갖 노역과 학대 속에서 죽어갔다.

우리가 아우슈비츠라고 부르는 곳은 폴란드의 공업도시 오시비엥침(Oswiecim)이다. 유대인 수용소이자 학살의 장소였던 오시비엥침은 지금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되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치는 후퇴하면서 수용소 건물을 모두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생각보다 아우슈비츠에 빨리 진입함으로 몇 개의 건물이 보존되었다. 사진 출처/ 아우슈비츠 박물관 페이스북

박물관 정문, 즉 수용소 입구에 들어서면 “ARBEIT MACHT FREI”라는 글귀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뜻으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유대인 강제 노역을 정당화한 문구다.

나치는 우수한 혈통 즉 아리안족을 보존하고 열등한 민족은 말살하여 국가 중흥을 꾀한다는 명분 아래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이 열등하다고 여겼던 유대인은 사실 돈 많은 부자에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우수한 민족이었다. 유대인의 우수성은 지금까지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를 200명 가까이 배출한 것만 봐도 증명이 된다.

박물관 벽에는 유태인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출처/ 아우슈비츠 박물관 페이스북

사회에서 사업가, 의사, 작가, 모범적인 시민이었던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우슈비츠로 끌려왔고 말할 수 없는 학대 속에 노동을 강요받아야 했다.

노동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아이들과 환자, 노인은 가스실로 보내졌다.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귀할 때였기에 나치는 그들의 소지품을 전부 압수 보관하였으며 총알도 아까워 독가스를 이용, 사망으로 인도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에는 그들이 남긴 신발, 지갑, 구둣솔, 의복 등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이 입었던 복장. 파자마를 연상시키는 줄무늬 옷이다. 사진 출처/ 아우슈비츠 박물관 페이스북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엘리 위젤의 소설 ‘예루살렘의 거지’를 보면 당시의 참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를 겪어야 했던 엘리 위젤은 누구보다 수용소의 참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소설에는 눈 내리는 날 일렬로 줄을 서서 막사를 이동하던 이들이 앞 사람 어깨에 쌓인 눈을 퍼먹는 장면이 나온다. 마실 물도 없을 정도로 유대인의 생활은 비참했다.

그렇게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300만 명이나 된다. 2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유대인의 절반을 헤아리는 숫자다.

외부에서 수용소 안으로 유대인을 실어나르던 기차 칸. 이것을 타는 순간 삶에서 죽음으로 운명이 바뀐다. 사진 출처/ 아우슈비츠 박물관 페이스북

1970년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에서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공식 사과한 이후, 2005년 슈뢰더 독일 총리도 국제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독일은 당시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 아파하며 지난 역사를 깊이 반성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라의 열쇠’ ‘소피의 선택’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같은 영화를 통해 많이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직접 아우슈비츠를 찾아가게 되면 또 다른 감정이 들 것이다.

유대인을 감시하던 수용소 초소. 당시 수용소를 둘러 싼 철망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사진 출처/ 아우슈비츠 박물관 페이스북

유럽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오시비엥침 즉 아우슈비츠가 유럽 정중앙에 있는 데에 놀라게 된다. 나치가 왜 아우슈비츠에 유대인수용소를 지을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을 한 곳에 모으기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가려면 폴란드 크라쿠프에 들러야 한다. 크라쿠프는 아우슈비츠에서 40km 떨어진 도시로 아우슈비츠까지 버스로 두 시간 거리다.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며 살아가던 유대인은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승전국이었던 미국의 승인 아래 유대인은 1948년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탄생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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