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다섯 번째 탐방, ‘이육사의 광야’가 지난 8월 22일 진행됐다. 고은주 소설가가 해설자로 나선 이번 문학기행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의 붓을 꺾지 않았던 민족저항시인, 이육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청량리역에서 시작해 홍릉, 종암동 문화공간 이육사, 청포도 시비, 북바위 둘레길로 이어졌다.
서울문학기행 ‘이육사의 광야’ 편은 육사가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가기 전에 아내와 어린 딸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청량리역에서 시작됐다. 사십 평생 열 일곱 번이나 붙잡히고 갇히며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도 저항시를 써왔던 육사가 죽음의 길로 떠나던 1943년 가을, 온몸이 포승줄로 꽁꽁 묶이고 얼굴은 용수로 가려진 채 일본 경찰에 이끌려 청량리역에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를 그때 세 살이었던 딸은 팔순이 된 지금까지 기억한다. “아버지 다녀오마.”란 말과 함께…
청량리역을 뒤로하고 홍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석초 시인은 1943년 1월 1일 청량리역에서 홍릉 쪽으로 ‘답설’을 재촉하던 이육사의 모습을 회고한다. 당시 ‘임업시험장’이었던 홍릉 숲에 이르러 태평양 전쟁의 정세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 곧 베이징으로 떠날 것을 알렸다. 이육사는 봄이 되자 죽음의 길로 떠나 여름에 붙잡힌 후, 가을에 다시 그 죽음의 땅으로 압송되어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11월 16일 새벽 5시,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중국 북경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육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마분지 조각에 적힌 유고 시들도 함께 수습했는데, 그중의 한 편이 ‘광야’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해방 이후 출간된 육사 시집의 대부분이 이미 발표된 것들이지만, <광야>와 <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조국이 해방된 후, 비로소 ‘자유신문’에 발표된 유작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 14세손으로 태어난 이육사의 호적상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고 자는 태경(台卿). 이활(李㓉)로도 사용하며 1930년 그의 글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264’는 23세에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에 연루되어 첫 번째 옥살이를 할 때의 수인 번호였다. 이후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생 입학명단에 육사(陸史)로 1935년 6월 이후는 이육사(李陸史)가 사용되었다.
이육사는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한 해 전인 1904년 경북 안동 원촌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배우며 유교적 전통 아래 유림의 독립정신을 이어갔다. 열여섯 살 때부터 읽었던 삼일 독립선언서를 머릿속에 새겨 놓고 스물한 살이었던 192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관동대지진 직후, 혼란과 분노 속에 죄 없는 조선인들을 괴롭히며 차별하고 있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결국 유학 생활을 일 년도 못 채우고 돌아온 그는 대구 조양회관에서 사회 운동단체를 통해 민족 계몽운동에 나서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만주와 중국을 드나들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광야>가 잉태되었던 청량리에서 홍릉 숲까지 펼쳐지는 홍릉로는 대한제국의 쓸쓸한 흔적의 길이기도 하다. 홍릉은 명성황후의 묘가 있던 곳이고, 그곳으로 가는 길의 오른편에는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과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의 묘인 숭인원이 있다. 이 길은 1895년 시해된 명성황후가 홍릉에 묻힌 뒤 이어지던 고종의 능행길이었다.
그 시절 임업시험장이었던 홍릉수목원은 이제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 홍릉 숲이 되었다. 이곳에는 오래되고 희귀한 나무들이 많아서 구경해도 좋지만, 식물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어서 자연을 공부하기에도 좋다. 특히 지나간 시절을 모두 지켜보았을 1892년생 반송과 함께, 명성황후가 묻혀 있던 홍릉 터와 고종이 잠시 쉬며 물을 마셨다는 어정이 있다.
홍릉 숲을 나서 종암동으로 향했다. 1939년 이육사가 살았던 종암동 시절은 일제 치하 30년이 지나면서 독립의 열망이 근대의 욕망과 친일의 기운에 밀리던 시기다. 이육사는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1933년 후반 무렵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서울의 지인 집에 머물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후, 요시찰 인물이 되어 떠돌다가 부모님과 아내, 형님 가족까지 함께 모여 살 게 된 곳이 종암동 62번지이다.
이곳에서 종암동에서 이육사는 1939년 <청포도>, 1940년에는 <절정>, <광인의 태양>, <교목> 등의 시를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한다. 1941년 딸 옥비를 낳은 후 명륜동으로 집을 옮겨간 뒤에도 본가가 있는 종암동을 자주 찾았을 것이다.
‘문화공간 이육사’는 육사의 외동딸인 이옥비 여사의 요청으로 성북구에서 마련한 곳으로 종암동 62번지 근처에 자리 잡고 2019년 12월 17일 개관했다. 이육사의 옛집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빌라로 바뀐 터라 생가터가 아닌 근처에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북카페 형식의 라운지, 2층은 육사의 생애를 보여주는 상설 전시장이며, 3층은 종암동 주민들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4층 옥상정원에서도 육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문화공간 이육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청포도 시비’가 있다. 종암동에 살면서 발표한 시로 <광야>나 <절정> 같은 시와는 달리 고향을 노래한 낭만적인 시로 해석되지만,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그의 소망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이육사는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으로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의 독립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북바위 둘레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종암동 주민들이 만든 생태 마을 둘레길로 총 10구간 중 3구간에 ‘이육사 시인 길’이 펼쳐진다. 청포도 시비와 그가 살았던 종암동 62번지를 둘러보고 북바위 유래비에서 이육사의 종암동 시절에 대한 해설을 들으며 ‘이육사의 광야’ 기행을 마무리했다.
이육사의 인생과 문학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를 보려면 안동의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가면 된다.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크고 훌륭하게 문학관을 지은 곳은 흔치 않다. 뒷산에는 이육사의 묘소까지 있어 그의 모든 것을 호흡할 수 있다.
이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로 살아야 했다. 그의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나키스트로서 자유로운 영혼과 심미주의자로써 예술가 기질도 엿볼 수 있다. 다만 역사적인 상황으로 그의 모든 것을 발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요즘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내외 상황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우리끼리도 불필요한 소모전이 많다.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아 모두가 본업에 집중하며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것이 진정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바쳐서 지켜냈던 조국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