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떠오르는 다크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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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떠오르는 다크투어리즘
  • 이혜진 기자
  • 승인 2019.08.09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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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매 운동 후 사람 많이 늘어”
최근 일본 불매운동이 어어지고 있는 가운데 8일 오후 한 무리의 학생들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출구로 나오고 있다. 이날 오후 150여명의 해양영토대장정 참가자들도 이 곳을 방문했다. 사진/ 이혜진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이혜진 기자] 폭염경보가 내린 8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좁은 벽관(일제의 고문시설)에 한 어린이가 들어가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눕거나 앉아있을 공간은커녕 서서 팔을 움직일 공간도 없었다. 어린이는 1분도 되지 않아 숨을 몰아쉬며 뛰쳐나왔다.
이어 자신의 어머니에게 “앞으로 독립운동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말했다.

한 여성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자신의 자녀에게 일본의 벽관 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역사를 생생하게 배우게 하고 최근 국내의 반일 움직임에 대해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사진/ 이혜진 기자

“불매운동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 이어지길” 

이곳을 찾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역사를 생생하게 배우게 하고 싶어 방문한 듯했다.

손톱 찌르기 고문을 재현한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던 한 여성은 자신의 자녀에게 “일본 고문관들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할 때 대나무 바늘로 손톱 밑을 찔렀다”며 “시신과 잠을 재우거나 달군 철사를 성기에 갖다 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한 여성이 자신의 자녀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손톱찌르기 고문실 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일본 고문관들은 과거 이곳에서 뾰족한 나무 꼬챙이를 독립운동가들의 손톱 밑으로 찔러 넣어 고통을 가했다. 이혜진 기자

한 남성은 전시관 옆 옥사 건물을 가리키며 자신의 대학생 자녀에게 “당시 수감자들은 앉을 자리도 부족해 돌아가면서 잠을 청했다”며 “고문으로 죽은 사람보다 옥사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이에 그의 자녀는 ”직접 옥사에 들어가 갇혀보니 생각보다 훨씬 열악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형장 내부를 살펴보던 한 남성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신문 스크랩하면서 일본 (불매운동) 기사를 읽을 때보다 직접 와서 보니 느낌이 다르지 않느냐”며 “여긴 한일관계의 상징적인 장소”라고 강조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사형장 앞에서 한 남성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서대문구는 오는 광복절을 맞아 14~15일 이곳에서 사형장 가상현실 체험 프로그램을 연다. 사진/ 이혜진 기자

그의 자녀 중 한 명은 “아직도 일본이 역사왜곡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며 “우리나라가 힘을 더 키워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관 내 편의점을 운영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ㄱ씨는 “불매 운동 후 역사관에 오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며 “불매운동이 잦아진 후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전시관을 바라보는 외국인 교환학생들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옥사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이들은 그들을 안내하는 한국인 남성 가이드에게 프랑스어로 거듭 질문하며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외국인 교환학생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옥사에서 나와 출구로 걸어가고 있다. 관계자 설명에 따르면 당시 이곳엔 35명까지 수용되었는데, 너무 비좁아 돌아가며 눈을 붙여도 2시간 밖에 못 잔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 이혜진 기자

남산 자락에서 일본 제국주의 살펴본 방문객들

같은 날 오후 방문한 남산 조선신궁(일본 건국신과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일본식 신전)터 주변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터가 있는 곳엔 현재 한양도성 현장 유적박물관을 건립하고 있다. 바로 옆 안중근 의사의 동상 앞엔 가족 단위 방문객들과 이곳을 혼자 찾아와 동상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 등이 모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한양공원 표석 주변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인들은 1908년부터 일본인 거류지역 외곽인 현재의 남산 분수대와 식물원 부지 일대에 약 30만평 규모의 ‘한양공원’을 만들어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5월19일 개원식을 가졌다. 이때 고종황제는 일본인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따라 ‘한양공원’이란 편액을 써보냈으며, 이것으로 표석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9일 오후 서울 중구 안중근기념관 옆에 세워진 동상의 정면과 옆에 동상을 응시하는 남성들이 있다. 이날 남산엔 100년의 아픈 역사 흔적을 찾아서 방문한 시민들이 많았다. 사진/ 이혜진 기자

일본은 이곳을 민족혼을 빼앗고 일본정신을 강요하기 위한 장소로 악용했다. 이 공원과 앞서 1897년 남산 북쪽에 세워진 화성대공원을 통합해 1940년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남산공원이다.

여기서 10분을 더 걸어가면 노란색 건물의 리라초등학교 옆에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이 있는데, 6·25 전란 때 여성과 아이들을 수용하던 모자원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엔 러일전쟁의 영웅 노기 마레스케를 모시던 신사였다. 해방 후 신사의 석등(돌로 만든 등대)기초이던 육각형 돌을 거꾸로 박아 받침돌로 쓰고, 수로로 쓰이는 마름모꼴 돌을 화분 받침으로 썼다. 역사 전복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은 다른 곳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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