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에서 만난 제주의 시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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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에서 만난 제주의 시린 역사
  • 이혜진 기자
  • 승인 2019.07.22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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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여 명 학살 현장...너븐숭이 4·3기념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학살사건의 아픔이 담긴 ‘너븐숭이4·3기념관’의 전경. 북촌리에서 4백여 명에게 벌어진 학살은 4·3사건 당시 단일 사건으로 너븐숭이는 4·3피해지역중 이(里) 단위로는 가장 희생이 컸다. 사진/ 이혜진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제주/ 이혜진 기자] 올레길19코스를 걸어본 적 있는가. 이 길에선 3·1운동에서 제주4·3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몸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날씨가 문제다. 22일 현재 기상청은 이달 말까지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폭우를 동반한 장맛비가 한두 차례 더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여름철 실내로 역사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 18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위치한 ‘너븐숭이4·3기념관’에 다녀왔다. 인근 옴팡밭 애기무덤 바로옆 양지바른 곳에 순이삼촌문학비가 세워져있다. 널브러진 관 모양의 돌덩어리는 당시 희생자를 표현했다. 사진/ 이혜진 기자

장맛비가 내린 지난 18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위치한 ‘너븐숭이4·3기념관’에 다녀왔다. 이곳 역시 올레길 19코스에 있다. 해당 기념관은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9년 1월 무장대의 기습에 군인 2명이 숨지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날 군 토벌대가 북촌리 주민 4백여 명을 무차별 총살하고 가옥을 불태운 학살 현장이다. 

북촌대학살의 비극은 30여년 뒤로 이어졌다. 작가 현기영(78)은 지난 1978년 소설 ‘순이 삼촌’을 집필, 제주4·3을 전국에 널리 알렸다. 인근엔 작가의 문학비들이 있는데, 누워 있는 비석 한 개에는 소설에 나온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제주말로 넓은 돌밭의 아기 무덤을 의미하는 ‘너븐숭이 애기무덤’에는 당시 무장단체의 총격으로 엄마 품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젖먹이 아이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에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은 학살의 현장에서 용케 살아남았지만 이후의 삶은 ‘산 송장’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두 자녀와 오누이의 뒤를 따랐다. 소설 속 ‘옴팡밭’엔 훗날 <순이 삼촌> 문학비가 세워졌다. 기다란 현무암 조형물이 나뒹군다. 비석 중 하나엔 소설의 한 대목을 새겨 넣은 글자가 보였다. 

‘너븐숭이4·3기념관’ 건물 내부엔 소설 ‘순이 삼촌’을 통해 제주4·3을 세상을 처음 알린 문학계의 거장 현기영 작가(78)을 소개하는 공간(오른쪽)이 마련되어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 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현기영, <순이 삼촌>)

학살의 마수는 순이 삼촌의 오누이를 비롯해 어린아이에까지 뻗쳤다. 옴팡진 밭과 너븐숭이 4·3기념관 사이의 애기무덤에서 이를 확인했다. 애기돌무덤만 무려 20여기. 학살 뒤 어른들의 시신은 산자들이 거둬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이날 기념관에선 현기영 작가가 집필 전 이 같은 내용을 취재할 때 사용한 손바닥만 한 녹음기를 볼 수 있었다.

북촌리 대학살의 비극을 보여주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 '젖먹이(왼쪽)'. 엄마의 윗저고리를 젖히고 젖을 빠는 아이가 남동생이다. 이 장면은 당시 학교 운동장에 모였던 주민들에게 잊히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 사진/ 이혜진 기자

건물을 나오며 ‘너븐숭이 4·3기념관’은 ‘기념’관이 아니라 ‘기억’관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가 김석범은 4·3의 55주년이었던 지난 2003년 4월 동아일보 칼럼 <기억의 부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기억이 말상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다. 역사 없는 곳에는 인간의 존재가 없다. 다시 말해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오랫동안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입 밖에 내지 못 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하나는 막강한 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 다른 하나는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 속에 집어 던져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었다. 4·3문제의 올곧은 해결은 아직 멀었지만, 공권력에 의한 재평가와 아울러 진상 규명, 명예회복 사업으로 더욱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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