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우린 여행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인지도 모른다. 유스호스텔에 들어가기엔 눈가에 주름이 너무 많고, 배낭을 메기엔 허리통증이 있고, 외국사람들과 즐겁게 여행하기엔 영어가 너무 짧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포기하면 언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아. 여행하다 갱단을 만나 절름발이로 돌아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가야만 해! 눈물을 닦느라 휴지를 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내 나이 서른둘, 남편 서른넷
1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집어 던지며 “세계여행 갑니다!”라고 외치는 순간만큼은 내 자신이 멋지게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남편도 같이 사표를 던지고 이제는 백수가 되어버린 두 남녀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량하게 남을 통장잔고를 상상하는 일과 이번 여행이 우리의 일상과 커리어, 안정된 미래와 맞바꿀 가치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일은 때때로 머릿속을 아득해지게 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1년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귀중한 경험이 될지에 대해 과장된 제스처를 섞어가며 서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비행기 표를 쓰다듬으며 잠이 들었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세계여행항공권’이다. 세계에 있는 많은 항공사들은 서로 연합을 만들고 이 연합에서 세계일주항공권을 발급하고 있다.

세계여행항공권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어떤 곳이든 세계 각국의 비행기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다. 거의 모든 항공권은 1년을 유효기간으로 하고 있으며 지구를 한 방향으로 돌면서 여행해야 하고 총 16곳으로 스톱구역을 정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세부적으로 다른 규정을 가진 항공권도 있다).
그러니 세계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세운다면 자신이 가고 싶은 지역을 정해 항공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비행 루트를 짜야 한다. 이 계획만 확실하게 짠다면 여행의 절반은 시작된 셈이다.
가장 대표적인 항공권으로는 스타 얼라이언스가 있다. 아시아나가 속해 있어 한국어 지원 서비스가 있는 스타 얼라이언스는 마일리지로 가격을 정하고 한 방향으로만 비행하도록 루트를 짜야 하기 때문에 대륙 간 거리와 국가 간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해서 선택해야 요금을 줄일 수 있다.
대한항공이 속해있는 스카이팀 역시 한국어를 지원하고 있으며 여행경비나 루트는 스타얼라이언스와 동일하다.

싱가폴 항공에서도 한국어를 지원하고 있지만 싱가폴 항공사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것이라서 동남아지역을 돌기는 편리하고 저렴하지만 북미나 아프리카로 가려는 여행객에게는 다른 이동수단을 겸해서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원월드 항공권은 좀 다른 방식으로 가격을 책정한다. 마일리지가 아니라 대륙으로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다. 전 세계를 호주 포함 6대륙으로 나누고 대륙을 늘릴수록 요금이 늘어난다. 한 대륙에서 오래 머무른다면 싸게 이용할 수 있지만 홈페이지에 한국어 지원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여행루트와 여러 편리성을 고려해 가장 대중적인 스타 에어라인에서 2,000만 원을 주고 항공권을 구입했다. 한 사람이 항공권만 천만 원이라니 큰돈이 아닐 수 없지만 유럽 한 곳으로만 가도 100만 원이 훌쩍 넘는 비행기 티켓 가격을 생각하면 저렴한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청춘과 주말을 헌납하며 꼬박꼬박 넣었던 적금과 예금을 모두 탈탈 털자 8,000만 원이 손에 쥐어졌다. 8,00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자 어쨌든 우리는 득의양양 했다.

이렇게 큰돈이 있는데 어디든 못 가겠어! 우리는 세계여행항공권 2,000만 원을 포함하여 총 5,000만 원을 전체 경비로 잡았다.
그러나 우리가 비행기를 타자마자 글로벌 경제위기로 환율이 급등했고, 우리는 살인적인 유럽물가를 온 몸으로 경험하며 생수 한 병을 살 때조차 손을 벌벌 떨어야 했다. 복병은 다른 곳에도 있었다. 남미의 와인에 둘 다 정신을 잃고 남미에 머무르는 동안 그렇게 많은 술을 퍼 마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인생에 철저한 계획 따위는 필요 없다.
결국 우리는 1년간 총 7,000만 원의 경비를 썼다. 돈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자고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였으나 예상하지 못했던 지출이 여행 곳곳에서 출몰했다.
우리에게 환율의 공포를 알려준 유럽일주를 마치고 두 번째 여행지로 정한 곳은 남미. 온갖 남미 정보를 섭렵한 후 우리가 결정한 나라는 7개국 정도였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유럽여행 중 만나 알게 된 친구가 강력 추천해 급하게 추가된 쿠바를 시작으로 경유지처럼 지나가는 파나마, 남미여행의 꿈을 처음 꾸게 한 마추픽추가 있는 페루, 비자 받기가 까다롭다고 해서 걱정인 볼리비아(그러나 우유니 소금 사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후가 여름과 겨울이 한 나라에 있어 옷이 한 짐이 될 게 뻔한 칠레는 싸고 품질 좋은 와인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다기에 포함했고, 세계 3대 폭포인 이과수 폭포의 나라 아르헨티나, 쌈바 축제 때 맞춰 가고 싶으나 시기가 맞지 않아 아쉬웠던 열정의 나라 브라질이 우리의 남미여행 방문예정지다.
유럽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여행에는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남미를 대할 때는 전혀 다른 두려움이 있었다. 남미를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보고 들은 범죄현장에 대해 한마디씩 충고를 해주었다.

"상파울로에서는 야간에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우면 무조건 권총강도를 당하니까 신호를 무시하고 가라",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아 친근하게 말을 시키기에 여행자 줄 알고 즐겁게 얘기했는데 알고 보니 도둑"이더라, "옷에 묻은 케첩을 닦아주는 척 하는 사람들은 소매치기다", "누가 친절하게 음료수를 건네줘서 먹었더니 옷과 돈을 빼앗기고 어디로 팔려간 사람이 있다"더라 등.
하지만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안전한 인생을 원한다면 집에서 무한도전을 보면 될 일이다. 우리는 안전하고 변화 없고 쳇바퀴 같은 일상이 지겨워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안전하고 변화 없고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반복하라고 태어난 건 아니잖아.’라는 마음속의 외침은, 어서 이곳을 떠나라는 깊은 갈망은, 나를 병들게 했다. 떠나지 못하는 가슴앓이는 마치 여기서 살고 있는 나를 진짜가 아닌 나처럼 만들었다.

진짜의 나는 15kg짜리 배낭을 메고 한걸음씩 남미의 어느 사막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가짜의 내가 사무실에 앉아 온갖 서류들과 싸우고 있다고 말이다. 진짜의 나와 만나기 위해서, 그 사막 안에 총을 든 갱단이 있든 초록빛 오아시스가 있든 그것은 직접 걸어 들어가서 확인해야 한다고 나를 다독였다.
신호등 앞에서는 차를 세우지 말고, 친근하게 누군가 말을 걸어도 모른 척 하며, 케첩을 닦아주려고 하면 단호히 뿌리치고, 건네주는 음료수는 절대 마시지 말자고 다시 한 번 각오하며 돈이 들어있는 복대를 속옷 깊숙이 찔러 넣었다.
비행기는 우리의 남미 첫 도착지인 쿠바 아바나 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

만다리, 그녀는
'모든 것은 공이다'라는 '만다라'를 인생의 신조로 실천하며 살고 싶으나 늘 생활 곳곳에서 허점을 보여서, 만다라는 관두고 점 하나가 빠진 '만다리'로 라도 살고 싶다는 그녀는 박민성.
연애 8년, 결혼 5년의 지루함과 밥벌이의 고달픔을 벗어 던지기 위해 딱 1년만 손잡고 다니자며 세계 일주를 떠난 부부.
그들이 떠난 세계여행에서 13개월 만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머리를 말랑하게 만들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정신없는 일상생활에 적응해가며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여행을 떠나겠다는 불타는 열망을 매일 밤 술로 달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