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자벌레여행기] 우수작 - 사랑하면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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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자벌레여행기] 우수작 - 사랑하면 닮아간다
  • 김혜민
  • 승인 2015.02.08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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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과 곤도라가 어루러지는 스키장의 멋진 풍경. 이하 사진 / 김혜민
설경과 곤도라가 어루러지는 스키장의 멋진 풍경. 이하 사진 / 김혜민

[트래블바이크뉴스] 제2회 자벌레여행기 우수작 김혜민  부산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천안으로 취업하는 바람에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지도 2년 차에 접어든다.

버스로는 4시간 거리, 돈을 더 엎어 KTX를 타면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우리가 일 년에 한두 번 연례행사로 싸우는 것은 어쩜 기적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다른 성격이기 때문이다. 뭐든지 대충 대충인 나와 꼼꼼한 그.

처음 만났을 땐,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마트에만 가도 그랬다.

► 곤도라 안에서 내려다 본 무주 스키장의 풍경.

► 겨울왕국의 올라프를 연상케하는 눈사람.

눈에 가장 먼저 띄는 물품의 유통기한만 확인하고 구매하는 나와 달리 물 하나를 사더라도 ‘제조 일자’, ‘가격’ 등 모든 것을 훑어보고 인터넷 리뷰까지 꼼꼼히 읽어보는 그 때문에 “대충 고르고 빨리 가자고.” 내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뿐만 아니라 플랜 B까지 세우는 그와 달리, 난 즉흥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3박 4일 첫 자유 해외여행 때는 현지에서 다음날 일정을 짜는 대범함도 지녔으며, 20살 첫 여행에서는 슈퍼 앞 평상에서 자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대책 없는 숙녀였다.

그런 내가 못마땅할 것은 당연지사. 나조차도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이 들었다. ‘대책 없음’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어쩜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2014년 마지막 여행은 내가 계획해보겠노라고 큰소리 땅땅 쳐놓았다.

문제는 그 대책 없는 자신감과 그 이후 변화 없는 나의 행동에서부터 온 듯하다. 12월 31일이 없다고, 누가 그런 소문을 냈던 것일까? 아마도 그것조차도 나였던 것 같다.

12월 30일을 한 해의 마지막이라고 착각했던 우리의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12월 30일. 액정에서는 큼직한 글씨로 오늘은 30일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다.

아버지 차를 빌려 가기 때문에 여행 출발지는 ‘포항’이었고, 오빠는 마지막 연휴를 맞아 ‘부산’ 집에서 캐리어를 들고 2시간 달려 포항으로 오고 있었다. ​

눈을 뜨니 우리가 여행을 정했던 그날이었다. 내가 여행 일정 다 짜놓았다고 큰소리쳐 놓았지만 사실 내가 정한 것은 남들이 1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 여행 전에 예약해야 하는 것들은 일정에서 제외했다. 준비해 놓은 것은 아이젠과 등산 스틱뿐.

그런 나에게 그가 바랬던 것은 따뜻한 커피 하나를 미리 사두라는 것 하나. 그 정도는 내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11시에 포항에서 출발해 1시 30분쯤 무주 스키장 근방에 도착했고, 조금 헤매는 바람에2 시가 되어서야 곤돌라에 탑승할 수 있었다.

► 상고대가 반기는 덕유산의 절경.

► 향적봉으로 올라가는 길.

올라갈 때는 ‘곤돌라’로 내려올 때는 ‘두 발로 직접’ 가고 싶다는 나의 고집으로 곤돌라 ‘편도권’을 끊었다. ​ 무주 스키장에 도착하니 얼마 전 무한도전에 나온 ‘터보’의 무대 의상처럼 현란한 스키 복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지나쳤고, 설렘이 극에 달했다.

곤돌라가 정상을 향하니 덕유산의 산줄기가 약동했다. 공기마저도 스키장 초보 코스에서 맡았던 공기와는 달랐다. 눈앞에는 아름다운 겨울의 꽃, 상고대가 펼쳐졌다. 안개는 자욱해 곤돌라가 하얀 겨울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덕유산이 상고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 명성의 진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을 견뎌내며, 나뭇가지 위에 쌓인 하얀 솜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설렘이 최고조에 달했다.

상고대가 어떻게 생기냐는 질문에 화공과 석사 출신답게 그는 지구과학 시간이 들었던 “이동성고기압”을 들먹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동성고기압의 영향을 대기가 안정되면, 안개가 생기고 이 안개가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얼면서 생기는 거야.”

언제나 꼼꼼하면서, 똑똑했던 그. 2년이 지나도 내가 처음 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덕유산 정상의 눈길.

►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겨울 여행.

향적봉(1,614m)으로 올라가는 길, 몇 번의 눈싸움에 콧물이 찔끔 나왔다. 온몸은 꽁꽁 얼었지만, 마음은 사르르 녹는 듯했다. ​ 눈을 볼 기회가 드문 포항/부산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온 세상이 하얗게 쌓인 눈만 보면 아이처럼 좋았다.

안개가 자욱했지만,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눈꽃이 만들어준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산 전체를 이루고 있었다. 겨울 왕국을 생각하며 눈사람도 만들었지만, 마치 모래처럼 잘 뭉쳐지지 않는 눈 때문에 만드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다. 눈도 삐죽, 코도 삐죽했지만 귀엽기 그지없었다.

정상에 다다르니 날이 조금씩 어두워져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지만, 시각은 겨우3 시 50분밖에 되지 않았다. 고산의 겨울 저녁은 다른 곳보다 빠르게 찾아오는 듯했다. 내 고집대로 하산하자니, 초보 등산객인 우리에게는 조금 위험했다.

곤돌라는 4시간 30분에 마감을 하니, 빠른 선택이 요구되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곤돌라가 마감될 경우에 직접 하산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고, 우리는 서둘러 곤돌라로 향했다.

산 정상에 “곤돌라 탑승할 고객은 빨리 하산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30~40분 올라간 길이였는데, 초인적인 힘이 발생한 것일까?10 분도 채 되지 않아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돌리기도 전에 곤돌라에 탑승했다.

결국, 바보같이 왕복 14,000원인 곤돌라를 편도권 2번을 끊어,20,000 원으로 구매하게 된 것이다.

► 몸도 마음도 가뿐한 덕유산 산행.

► 하루를 벌게 된 여행의 행복한 저녁.

나답게 그리 철저히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 여행은 생각보다 잘 흘러갔고, 겨울 산행은 ‘곤돌라’로 대체되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포항으로 향했고, 숙소 앞 맥줏집으로 향했다. 한 해의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없었다. 드문 정도가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였다. 포항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30일 마지막 날인데 왜 사람이 적지?”

우리의 궁금증은 거기까지였다. 사람이 너무  많을까 봐 호미곶과 떨어진 구석진 바닷가에 숙소를 정했으니 그랬으리라 으레 생각했다.
 
둘 중 누구도 31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름 화공과 석사인 그와 장학금을 받은 적도 있는 똘똘한 나였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우리의 카카오톡에 “벌써 새해 복이야?”라고 되묻는 친구들의 메시지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11시 30분까지 산책을 하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들어가 카운트다운을 하겠노라고 TV에 시상식을 틀어놓았다. 하지만 12시가 지나도 보신각종을 울리지 않았고, 우린 SBS가 미쳤노라고 역정을 냈다. 그러다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12월 31일까지 있어?”

한참을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순간 망치를 머리에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고, 아침부터 우리가 했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메시지, 말들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제발 그 점만은 닮지 않길 바랬는데 점까지도. 그가 나에게 동화되는 바람에 바보의 행진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았다.

"우리에게 하루가 더 생긴 기분인걸?" 배시시 웃는 그를 보니 나도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는 남들보다 하루 일찍 새해를 준비했고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다음날, 예정대로 해를 보기 위해 바다로 나왔고, 난 동그랗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

"나의 그를 위해, 내년에는 좀 더 현명하고 똑똑한 여자가 ​ 되게 해주세요."​

# 심사평

공모전 주제에 가장 부합하며 반전의 재미까지 갖춘 우수한 작품입니다. 빈틈없는 남자친구와 함께 착각한 한 해의 마지막 날 12월 30일. 덕분에 두 연인은 하루를 더 벌어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글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왜 ‘사랑하면 닮아간다’인지 알게 됩니다.

사진이 글 내용과 좀 더 밀접했다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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