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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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씬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 정현경
  • 승인 2014.10.14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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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과 함께 다이어트까지 챙기려 했던 야침찬 여행 프로젝트. 무더운 6월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진은 전통관혼상제가 열리고 있는 풍경. 사진 / 정현경
힐링과 함께 다이어트까지 챙기려 했던 야침찬 여행 프로젝트. 무더운 6월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진은 전통관혼상제가 열리고 있는 풍경. 사진 / 정현경

“오~ 우리 뚱땡이 왔냐~? 어서 와라.”

헉, 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뭐지? 뚱.땡.이? 지금 저 단어가 맏며느리 예뻐서 10년째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신다는 아버님한테서 나온 거 맞지? 가슴에 비수를 던져놓고 입이 귀에 걸리게 활짝 웃고 계신 저 분이 우리 아버님 맞는 거야?

지리산 둘레길, 무주 걷기 대회 등으로 1주일에 5kg 감량 계획...

그 후 시간을 시댁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그다지 기억에 없다. 나는 식구들 농담에 꽁하지 않는 쿨한 여자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내내 마네킹 미소를 띠고 있었을 뿐, 살림을 잘해 예쁘다든지 내조를 잘해 고맙다든지 하는 소리도 그저 귀에서 웅웅 울리며 스쳐갔다. 다만 지나치는 유리창마다 눈꼬리 찢어지게 내 몸매를 비쳐봤던 건 기억이 난다.

► 거리 페스티벌에 나온 외국인들의 모습.

► 신비로운분위기의캄보디아그림자극,스벡톰크메르.

집에 돌아오자마자 일단 다음 주에 등록하려던 요리강습부터 취소. 좀 기다렸다 날씨 서늘해지면 온천에 가서 몸도 뜨끈하게 지지고 맛있는 거 실컷 먹자던 휴가 계획도 선회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막 더워지는 6월, 우리는 전주 문화 축제를 시작으로 지리산을 거쳐 무주 축제까지 이어지는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남편이 알기로는 흥겨운 축제를 섭렵하는 전라도 기행이었지만, 사실 나의 계획은 지리산 둘레길을 이틀에 걸쳐 주파하고 무주에서는 반디마실길 걷기 대회에 참가해 1주일 만에 일단 5킬로그램 정도를 감량한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첫 도착지인 전주는 나의 계획에 협조적인 여행지는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 무형문화유산축제>라고 해서 이름부터 거창한 전주 축제에는, 돈 한 푼 없이 즐길 수 있는 구경꺼리가 정말 많았다.

한옥마을 거리를 그냥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이국적인 공연과 전시가 펼쳐졌고, 지나는 골목마다 아시아 각국의 신기한 먹거리들이 나를 유혹했다. 거리 페스티벌을 구경하다 보면 옆에서 터키식 꼬치구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신명나는 남사당패 공연을 보고 나오면 어쩐지 나도 한바탕 뛰고 난 듯한 후련함에 콩나물국밥을 찾게 되었다.

거기에 청하지도 않은 공기밥과 모주는 왜 서비스로 주시는 건지. 챙겨주시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그저 예의상 한 모금만 마시려고 했지만, 캬~ 달짝지근한 모주는 또 왜 이리 맛있는 게야. 나는 남편 몫의 잔까지 들어 냉큼 마셔버리고 말았다.

웰빙 한방주는 몸매관리에 나름 도움이 되기에 한 잔~

물론 어디까지나 운전자인 남편을 위한 배려다! 알코올 도수가 거의 없다지만, 그리고 이후 운전 계획이 전무하지만, 그래도 여행이라는 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모주는 소화를 돕는 웰빙 한방주라 하니 몸매관리에 나름 도움이 될 듯도 하고. 에헴!

남사당패 공연 모습.

► 혼례행렬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이다.

저녁을 거하게 먹은 대신 열심히 돌아다니며 칼로리를 소진시키면 된다. 마침 밤마다 중국, 캄보디아, 인도의 그림자극 공연이 있었고, 오목대에서는 한옥마을의 야경을 배경으로 판소리, 가야금, 대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이 되어 바람도 선선한데 달빛 아래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로 울리는 대금과 가야금의 조화라니,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그런데 한껏 솟은 풍류를 돋우려 주최 측에서 뭔가 먹거리를 돌렸다. 임실치즈마을에서 직접 만든 요거트라나. 아, 이것까지만 먹고 정말 금식해야지! 숙소로 가는 길, 그 유명한 전주 가맥(황태구이 등 즉석 안주와 더불어 제공되는 가게 맥주)집을 그대로 지나칠 수만 있다면, 연탄불에 황태 굽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던 그 골목을 굳건히 지나칠 수만 있었다면 말이다.

그래도 둘레길과 반디마실길이 남은 일정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전주에서만은 자신에게 약~간 아주 약간은 너그러워져도 괜찮겠지. 전주는 다이어트 여행지로 삼기에는 맛집이 너무 많은 곳이니까. 하.하.하.

전주를 떠날 때 지리산 코스는 나에게 더욱 중요한 여행지가 되어 있었다. 동네 뒷산에 한번 올라보려다가 열다섯 걸음 만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 있던 터라 일찌감치 지리산 종주는 선택지에서 제외했지만, 둘레길이라면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감량 프로젝트는 사라지고 식탐여행이 되버린 여행...

숙소 위치는 창문만 열면 앞으로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는 완벽한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계곡이 문제였다. 돌 틈 사이로 소리도 경쾌하게 졸졸대는 물과 송사리 떼들을 목격한 남편이 대뜸 양말을 벗고 바위 위에 철퍼덕 앉더니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라도 둘레길 걷기에 나설 것이냐, 남편과 물놀이를 즐길 것이냐 기로에 놓였다.

► 계단식논옆으로흐르는시냇물이정겹다

► 다람쥐 정도는 수시로 볼수 있는 지리산.

► 축제의 밤이 깊어간다.

처음엔 호기롭게 혼자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나섰는데, 십여 미터 채 못 가서 길 옆 풀숲으로 뭔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배, 뱀이다! 호들갑스런 내 반응에 아마 그 놈이 열 배는 더 놀랐겠지만, 어쨌든 그로써 둘레길 완주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리산 거쳐 무주까지 가면서 가장 운동을 많이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차, 혹은 꾸불거리는 길 안내에 고생한 내비게이션.

공기 좋은 곳만 골라 다니며 며칠 더 놀고먹느라 붙은 살들을 안고 무주로 이동했다. 섶다리 위에서 벌어지는 한복 패션쇼를 구경하고 전통 혼례 행렬에 환호하며 신나다가도, 문득 뭔가 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축제장을 돌아다니다가 아이들 놀이터에 도착했을 때, 애써 감추려던 내 무의식을 엿보고야 말았다. 축제장 한 가운데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던 돼지 한 마리. 얘야, 너 왜 거기에 있니? 이렇게 보니 돼지란 동물이 생각보다 날씬하네. 그렇지 않아?

남편의 은근한 비웃음을 등짝 스매싱으로 응징하고 나의 마지막 보루인 반디마실길 출발지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인기 만점 이벤트인지라 이미 예약완료. 반딧불도 구경하고 운동도 겸하려던 나의 알량한 명분도 그렇게 날아가고 말았다.

감량은 커녕 식탐여행이 돼버린 이번 프로젝트는 실패, 대실패였다. 여행 마지막 밤, 운 좋게 꼽사리끼어 날리게 된 풍등. 무주 밤하늘을 반짝이며 날아가는 등을 황홀하게 쳐다보는 남편 귀에 대고 속삭여본다.

“여보, 그때 아버님이 나보고 우리 ‘이쁜’ 뚱땡이라고 그러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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