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는 17일 ‘해미순교성지’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아시아 주교들을 만나고, ‘해미읍성’으로 이동해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집전하게 된다.
‘해미’는 내포 지역의 여러 고을 가운데 유일하게 군영이 설치된 요충지로, 수천 명의 가톨릭 신자를 처형하던 본거지다. 교황은 순교자의 피로 물든 성지를 찾아 위로와 평화의 기도를 올릴 예정이다. 교황을 맞이하기 위해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해미성지와 해미읍성을 돌아봤다.
한국에서 유일한 생매장 순교 터 ‘해미순교성지’
가톨릭의 여느 순교지보다도 참혹한 곳이 바로 해미성지다. 약 백 년 동안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신자들이 이곳에서 스러져갔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대박해로 알려진 때 외에도 끊임없이 처형이 이루어진 곳이다. 성지 곳곳에서 그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대성당과 수녀원 건물을 지나면 자리개돌이 놓여있다. 서너 명의 군졸들이 신자들의 팔다리를 붙잡고 자리개질하듯 돌에 메어쳐 처형했던 도구다. 이 위에 여러 명을 함께 묶어 눕히고 돌기둥으로 눌러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해미읍성 서문 밖에 놓여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2009년 1월 이곳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자리개돌 맞은편에는 순교성지기념관이 세워졌다. 무덤을 형상화한 모양의 기념관에 들어서면 성지의 역사와 박해의 흔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곳 생매장터에서 발굴한 순교자의 치아와 뼛조각 등이 진열된 유해참배실은 순교자를 위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밧줄에 묶여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교자의 조각상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대박해 당시,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 생매장을 시키기도 했다. 해미읍성의 서쪽 들판으로 수십 명씩 끌고 가 산채로 구덩이에 넣고 묻어 버린 것이다.
해미성지가 자리한 이곳이 바로 해미 진영에서 서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1935년 유골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생매장 터로 알려졌다. 이곳은 신자들이 죽어가며 "예수 마리아!"를 외치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은 주민들에 의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온다.
군졸들은 여숫골로 끌고 오던 신자들을 진둠벙에 밀어 넣기도 했다. 몸이 줄줄이 이어 묶인 채로 둠벙 속에 내쳐진 신자들은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처박혀 죽음을 맞이했다. 죄인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죄인둠벙’으로 일컬어지다가 오늘날 ‘진둠벙’으로 불리고 있다.
약 100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무명의 순교자를 위해 성지 안쪽 유해 발굴지에는 무명 순교자의 묘와 함께 16m 높이의 순교탑이 세워져 넋을 달래고 있다.
선조의 숨결과 아픈 역사가 공존하는 ‘해미읍성’
17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게 될 해미읍성은 낙안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조선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조선 시대 충청지역의 관문으로 성벽을 따라 선조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읍성의 모습 속에는 아픈 역사도 함께 공존한다. 바로 이곳이 천주교 박해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해미 진영의 겸영장은 내포 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주변 지역에서 죄인으로 붙잡힌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끌려오게 된 것이다.
옥사에 갇혀 갖은 고문을 받던 신자들은 서문 밖으로 끌려가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자리개질, 백지사형, 생매장 등 참혹한 모습으로 처형됐다. 병인박해 때 조정에 보고된 기록으로는 이곳에서 처형된 신자 수가 천여 명으로 알려진다. 이에 더해 그전 박해 기간에 행해진 처결의 수 역시 수천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으로 들어가면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옥사와 동헌, 객사 등이 깔끔한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읍성 한가운데 서 있는 웅장한 자태의 호야나무도 눈길을 끈다. 수백 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호야나무는 그 시절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손과 발, 머리채가 묶인 신자들이 나무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무 틈에 철삿줄이 박혀 있고 가지에는 그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교황의 방문을 앞두고 해미를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지만, 그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듯하다. 해미의 순례길은 종교를 넘어 아픔의 역사로 오래도록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