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기행, 정릉천 따라 찾아가는 ‘박경리 불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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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기행, 정릉천 따라 찾아가는 ‘박경리 불신시대’
  • 김효설 기자
  • 승인 2020.08.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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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2.3부를 집필한 정릉 가옥과 경국사, 청수장
서울문학기행의 네 번째 탐방이 ‘박경리의 불신시대’를 주제로 정릉천을 따라 펼쳐졌다. 사진/ 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네 번째 탐방이 ‘박경리의 불신시대’를 주제로 정릉천을 따라 펼쳐졌다. 사진/ 김효설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김효설 기자] 서울문학기행의 네 번째 탐방이 ‘박경리의 불신시대’를 주제로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 지난 8월 1일 정릉천을 따라 펼쳐졌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박덕규 교수의 해설로 진행된 이 날 문학기행은 삼각산 경국사, 문화가 있는 산책로, 박경리 정릉 가옥(현재는 발도르프 대안학교), 청수장(북한산 탐방안내소)으로 이어졌다.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에서 출발한 문학기행 일행이 정릉 어울림마당에 도착해 정릉천 문화산책로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장맛비로 정릉천의 수위가 높아져 안전사고를 대비해 통제되고 있었다. 정릉천 문화산책로를 뒤로 하고 도착한 곳은 ‘삼각산 경국사’. 1325년 자정 율사가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본사 조계사의 말사로 삼각산의 청봉 아래 있다고 하여 ‘청암사’라고 불렸다. 창건주인 자정 율사는 계율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법화, 유식 등에도 조예가 깊어 당시 청암사는 계율과 법화경 관음 신앙을 숭상하던 사찰이었다.

‘삼각산 경국사’는 1325년 자정 율사가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삼각산 경국사’는 1325년 자정 율사가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1330년경에는 무기가 머물면서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친 바 있으며, 창건 이래 한국 계율의 맥을 이어 온 도량으로 정토사상에 바탕을 둔 기도 도량으로서도 대표적인 사찰이다. 1545년 명종조 때 왕모인 문정왕후가 불사하면서 국가의 경사스러움을 끊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1698년에는 연화승성 스님이 절을 증수하고 천태성전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을 모신 전각으로 이때 기록한 ‘천태성전상량문’이 지금도 전한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는 보경 금어 큰스님의 뒤를 이어 주지 소임을 맡은 지관 대종사(전 조계종 총무원장)가 경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으며, 2005년에 한국불교의 율풍 진작에 헌신했던 자운대율사의 계주원명사리탑도 이곳에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 극락보전·영산전·명부전·관음전·삼성보전·천태성전·산신각·봉향각·시방선원·부림정사·동별당·요사 등 17동의 건물이 있다. 그 가운데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보물 제748호로 지정된 목각탱화 및 신중탱화·팔상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박덕규 교수의 해설로 진행된 이 날 문학기행은 삼각산 경국사, 문화가 있는 산책로, 박경리 정릉 가옥(현재는 발도르프 대안학교), 청수장(북한산 탐방안내소)으로 이어졌다. 사진/ 김효설 기자
단국대 문예창작과 박덕규 교수의 해설로 진행된 이 날 문학기행은 삼각산 경국사, 문화가 있는 산책로, 박경리 정릉 가옥(현재는 발도르프 대안학교), 청수장(북한산 탐방안내소)으로 이어졌다. 사진/ 김효설 기자

 

경국사 한쪽에서 박덕규 교수의 해설이 시작됐다. “정릉은 1950년대 이후 미술과 음악 문학 등 장르를 넘어선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공간이다. 소설가 박경리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인천을 거쳐서 서울로 이주해 강원도 원주로 내려가기 전까지 이곳 정릉에 집을 짓고 15년 동안을 살았다”며 “오늘 찾아가는 정릉 가옥은 ‘토지’ 1·2·3부가 완성된 곳으로 등단 이후, 10년 동안 초기 단편과 1960년 전후의 장편을 집필하며, 이미 한국 대표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후 또 하나의 도약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설명했다.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45년 경남 진주여고 졸업했다. 1946년 1월 21세에 김행도와 결혼을 하고 장녀 김영주를 출산한다. 남편, 친정어머니, 딸과 함께 인천 주안 근처 금곡동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며, 이곳에서 아들 철수 출생한다. 1949년 서울로 이주해 흑석동에서 거주하면서 서울여자가정보육사범학교(수도사대 현, 세종대) 전문과정을 마쳤다. 1950년 25세에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로 근무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서울로 돌아왔으나, 남편이 검거돼 12월 25일 남편과 사별한다.

소설가 박경리는 1955년 김동리에게 초회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으로 등단해, 19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사진/ 토지문화재단
소설가 박경리는 1955년 김동리에게 초회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으로 등단해, 19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사진/ 토지문화재단

이후, 1955년 30세에 김동리에게 초회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으로 등단한다. 19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나 아들이 의료사고로 사망한다. 1957년 32세에 소설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 발표.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한다.

1960년대에 들어 1962년 37세에 전작 장편 ‘김약국의 딸들’, 1963년 38세에 ‘불신시대’를 간행한다. 1969년 44세에 대하소설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1972년에는 ‘토지’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하고, 토지 1부로 ‘월탄문학상’을 수상한다. 1973년 48세에 토지 1부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하고 그해 4월 딸 김영주와 시인 김지하가 결혼한다. 1974년 49세에 토지 2부가 삼성출판사에서 간행된다. 1977년 52세에 ‘토지’ 3부를 주부생활’’에 연재하고 1980년 55세에 ‘토지’ 3부가 삼성출판사에서 출판된다. 이해에 딸이 사는 원주시 단구동으로 이사한다.

정릉 청수장 부근에 집을 지어 1965년부터 살기 시작해 1980년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15년간 머물렀다. 정릉 가옥에서 거주하면서 ‘토지’ 1,2, 3부를 완성하는 등 정릉 가옥은 박경리의 대표작들이 잉태되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정릉 청수장 부근에 집을 지어 1965년부터 살기 시작해 1980년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15년간 머물렀다. 정릉 가옥에서 거주하면서 ‘토지’ 1,2, 3부를 완성하는 등 정릉 가옥은 박경리의 대표작들이 잉태되었다. 사진/ 김효설 기자

1983년 58세에 ‘토지’ 4부를 정경문화에 연재하고 토지 1부를 8권으로 일본어판을 출간한다. 1984년에는 ‘한국 전후 문학 30년의 최대 문제작’으로 선우휘 ‘불꽃’, 황석영 ‘장길산’과 함께 ‘토지’가 선정된다. 1987년 토지 4부를 ‘월간경향’에 연재하고 1988년 토지 1부~4부 개정판을 지식산업사에서 출판한다. 1992년 67세에 토지 5부를 문화일보에 연재하고 1993년 토지 1부~4부, 5부 1권(전 13권)을 솔출판사에서 간행한다. 1994년 8월 15일 69세에 집필 26년 만에 토지 탈고, 전 5부 16권으로 솔출판사에서 완간한다.

1999년 74세에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을 개관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그 후, 2002년 77세에 나남출판사에서 ‘토지’를 총 21권으로 재출간한다. 2006년 81세에 원주시 단구동 옛집에 ‘토지 집필실’ 개관한다. 2008년 5월 5일 83세의 나이로 서울 아산병원에서 타계해 고향인 통영시에 안장된다.

‘정릉천 문화산책로’는 이중섭, 박경리, 신경림, 최만린 등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 거닐며 영감을 주고받았던 길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정릉천 문화산책로’는 이중섭, 박경리, 신경림, 최만린 등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 거닐며 영감을 주고받았던 길이다. 사진/ 김효설 기자

1926년부터 2008년까지 박경리 작가의 연보와 생애에 대한 박덕규 교수의 해설을 듣고 박경리의 정릉 가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정릉천 문화산책로’는 이중섭, 박경리, 신경림, 최만린 등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 거닐며 영감을 주고받았던 길이다. 장마로 수량이 넘쳐 통제되고 있어서 일부 구간만 걸을 수 있었다. 이윽고 정릉동 768-2번지에 있는 박경리의 정릉 가옥에 도착했다. 현재는 발도르프 대안학교가 사용하고 있어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건너편 다세대 주택의 담장에 ‘박경리 정릉 가옥’이란 표식이 이곳을 알려주고 있었다.

토지의 산실인 ‘정릉 가옥’은 박경리가 서울로 이주해 흑석동에서 살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1960년대 초반 돈암동을 거쳐 정릉 청수장 부근에 집을 지어 1965년부터 살기 시작해 1980년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15년간 머물렀다. 정릉 가옥에서 거주하면서 ‘토지’ 1,2, 3부를 완성하는 등 정릉 가옥은 박경리의 대표작들이 잉태되고 외동딸 김영주와 ‘오적’을 발표한 시인 김지하의 연애와 결혼이 이뤄진 행복한 장소였지만, 반공법 위반으로 피신해 있던 사위가 체포된 고통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단편 소설 ‘불신 시대’는 박경리의 초기 대표작이자 그 시기의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56년 아들을 잃은 비극을 견디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작가로서 고통스럽게 내재화한 작품이다. 사진/ 박경리 기념관
단편 소설 ‘불신 시대’는 박경리의 초기 대표작이자 그 시기의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56년 아들을 잃은 비극을 견디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작가로서 고통스럽게 내재화한 작품이다. 사진/ 박경리 기념관

1957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단편 소설 ‘불신 시대’는 박경리의 초기 대표작이자 그 시기의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56년 아들을 잃은 비극을 견디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가 있으며, 작중 아들 문수의 죽음은 개인적인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같은 개인사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은 1957년에 발표한 ‘영주와 고양이’다. ‘불신시대’에서 아들의 죽음은 의료부주의에 따른 사고였다. 그 죽음은 개인적 운명이라 할 수 없었고, 그것을 작가로서 고통스럽게 내재화한 작품이 바로 ‘불신시대’다. 작가는 다른 여러 단편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여주인공의 환경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점이 외부로부터의 피해 의식이 강하고 감상적 경향 짙다.

이 소설의 배경은 6·25전쟁 직후 혼란스러운 서울이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혼란한 사회에서 부도덕하게 타락하는 인간상을 표현하고 고발하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진영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친정어머니와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외아들 문수를 잃었다. 진영은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죽어간 아이의 울음소리’를 잊기 위해 종교에 매달린다. 그러나 진영이 보게 되는 것은 ‘시주받은 쌀을 착복하는 중’과 ‘도적 맞을까 봐 신발을 싸 들고 예배 보는 신도’ 등이었다. 여기에 Y 병원은 환자에게 투여할 주사약의 분량을 속이고 S 병원은 건달 꾼이 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H 병원은 빈 외제 약병을 내다 팔고 있었다.

‘박경리의 불신시대’를 주제로 펼쳐진 탐방의 마지막 코스로 옛 청수장 자리인 ‘북한산 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박경리의 불신시대’를 주제로 펼쳐진 탐방의 마지막 코스로 옛 청수장 자리인 ‘북한산 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사진/ 김효설 기자

의지하려 했던 성당 주변에는 자신의 돈을 떼먹고 사기 치는 신자가 자신을 인도하려 한다. 아이의 극락왕생을 빌어줄 절에서는 바치는 돈이 적다고 “당신네들 같으면 중이 먹고 살갔수?”하는 말로 무시하고 차별한다. 진영은 죽은 아이의 위패와 사진을 되찾아 불을 지르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진영이 아들의 위패와 사진을 태우고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오며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중얼거리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불신시대’가 발표된 1957년 한국의 사회생활은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그 자리에 국가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타락과 폭력이 만연되던 시기였다. 제도와 관계의 이면에서 돈을 먼저 움켜쥐려는 자들에게 오로지 생존을 위해 빌붙으며 사기와 농락을 당하고 있는 ‘불신의 나날’이 깊어진다. 작중 아들 문수의 죽음은 전쟁미망인 진영에게 쓰인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이 같은 불신시대의 사회적 희생이다. 진영은 “육신과 더불어 정신이 해체되어가는” 상황을 겪으면서 그 불신을 뿌리 깊이 각인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각에부터 새로운 생명의 의지를 건져 올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훗날 ‘토지’라는 대작의 생명 사상과도 연계된다.

김종환 대금연주가의 ‘이생강류 대금산조’ 공연이 있었다.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장단이 4번 바뀌는데 즉흥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다. 사진/ 김효설 기자
김종환 대금연주가의 ‘이생강류 대금산조’ 공연이 있었다.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장단이 4번 바뀌는데 즉흥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다. 사진/ 김효설 기자

탐방의 마지막 코스인 옛 청수장 자리인 ‘북한산 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이곳에서 김종환 대금연주가의 ‘이생강류 대금산조’ 공연이 있었다. 산조는 조선 후기 판소리 인기에 힘입어 판소리의 대목을 악기로 표현하려는 연주자들의 기악 독주곡의 하나다.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장단이 4번 바뀌는데 즉흥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다. ‘이생강류 대금산조’에 이어 앙코르로 1930년대 가요로 나온 현재의 ‘아리랑’과 편곡한 이전의 ‘구 아리랑’의 대금산조를 듣고 어둠이 내린 ‘북한산 탐방안내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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